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필리핀 여행기(4)
오전 7시도 안 된 이른 시각, 호스텔 룸메이트들의 부지런함에 나도 잠이 깼다. 호스텔 숙박의 장점 중 하나, 잠귀가 밝은 나 같은 사람은 알람을 맞춰놓지 않아도 늦잠 잘 일이 없다. 하지만 나는 바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일어나자마자 어제의 그 소매치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어나면 다시 프놈펜을 여행해야 할 테고, 돌아다니다 보면 또 소매치기의 위험에 노출되게 될 텐데. 잠이 덜 깬 채 이런 생각을 하다가 억지로 다시 잠을 청했다. 한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이대로 계속 누워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일어나 준비하고 숙소를 나섰다.
어제 대략 다음 행선지를 프놈펜 왕궁이나 뚜엉슬랭 대학살 박물관으로 정해놨지만, 숙소를 나오자 자연스럽게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북쪽으로 발걸음이 갔다. 프놈펜 왕궁이나 뚜엉슬랭 대학살 박물관은 남쪽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어제도 남쪽으로 걸어갔었기 때문에 어제와 똑같은 풍경을 보기 아깝다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했던 것 같다. 숙소 북쪽에는 왓 프놈이라는 프놈펜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불교 사원이 있는데, 사원 내부로 들어가 보진 않고 바깥에서 잠깐 눈으로만 담고 서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딱히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고 반시계 방향으로 반바퀴 돌아 남쪽으로 가자는 생각에서였다.
정처 없이 한 시간 정도를 돌아다녔을까. 잠도 완전히 깨고 슬슬 허기도 지기 시작해 항상 쓰던 그 방법으로 아침 겸 점심을 먹을 식당을 선택하기로 했다. 구글 맵을 보면 누렇게 표시된 구역이 곳곳에 있는데, 상점도 유동인구도 밀집한 지역이라 식당 또한 그 구역 내에 많이 있을 확률이 높다. 가본 적 없는 근처 구역을 하나 찍고 가다가, 그 구역에 진입하기도 전에 지역 주민들로 북적이는 식당 하나가 눈에 띄어 주저하지 않고 들어갔다. 비어있는 자리를 골라 앉아있으니 직원 한 분이 다가왔는데 메뉴판은 따로 없고 수프 누들을 판다고 하시기에 그걸로 한 그릇 부탁드렸다. 오늘 먹을 쌀국수는 어제 먹었던 것과 어떻게 다를지 기대하며 기다리다 보니 금방 음식이 나왔다. 먼저 국물부터 한 숟가락 떠서 맛을 보았는데 나쁘지는 않았지만 어제 먹었던 쌀국수 국물에 비해 덜 깔끔하고 담백했다. 하지만 이 집의 쌀국수는 면을 먹어야 진짜를 맛볼 수 있었으니 얇은 쌀국수 면에 푹 배긴 국물이 면과 어우리 져 처음에 느꼈던 부담스러운 국물 맛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튀김가루 비슷한 짭짤하고 매콤한 작은 고명이 면과 함께 딸려오면서 바삭한 식감까지 즐길 수 있게 해 주고, 거기다가 비리거나 잡내 하나 없는 맛있는 고기 완자까지 곁들여 먹으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처음부터 양념을 추가하지 않고 반 정도 먹고 나서 맵싹한 다진 고추 양념을 듬뿍 넣어 맛에 변주를 주니 마지막까지 질리지 않고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식당이 구글 맵에는 등록되어 있지 않아 같은 건물의 다른 상점 링크를 첨부: https://maps.app.goo.gl/K2ugVUz1UzYoevi29)
식사를 마친 뒤, 그 주변에서 1달러 짜리 아이스커피 하나 사들고 마저 그 구역을 돌아다녀 보았다. 나는 여행지의 유명한 관광 명소를 방문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관광객들은 거의 가지 않는,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자연스러운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골목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도 즐긴다. 역시나 이곳에서도 마음에 쏙 드는 골목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더위가 절정에 이르는 한낮도 다가오고 있었고, 어느새 숙소에서 멀리 떨어져 버려서 더 멀어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보기로 했다. 돌아가는 길에도 매력적인 거리의 풍경이 즐비하게 기다리고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목적지 없이 걷고 또 걸으며 천천히 여행지를 눈에 담는 이 여행방식을 어떻게 좋아하게 됐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좋아하게 되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침의 우려와는 다르게 즐겁게 오전 일정을 마쳤다. 어제의 프놈펜은 잔뜩 흐렸었는데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걸어 다니며 구경하기에도 좋았고, 마음에 드는 풍경들도 많이 볼 수 있어 어젯밤에 비해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물론 돌아다니면서 호객꾼 들이나 가방 속 귀중품이 수시로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계속 주의해서 다니는 게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남은 세 달도 이렇게 조심해서 다니면 큰 문제는 안 생기지 않을까.
다리도 쉬게 할 겸, 숙소 1층 로비에서 어제 쓰다 남은 글을 두세 시간 정도 쓰고 있다 보니 오전의 맑았던 날씨가 잔뜩 흐려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내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왕궁이나 박물관 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아 내일 이른 오전으로 미루고, 여행 전에 미리 찾아두었던 헬스장에 가기로 했다. 대부분의 프놈펜 헬스장 가격이 1일 3~5달러 선인데, 지금 숙소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의 헬스장 하루 요금이 1달러라기에 구글 맵에 고이 저장해 놨던 것이다. 조금 약해진 비를 뚫고 헬스장을 찾아가 보니 1달러라는 요금에 걸맞게 천정의 팬 몇 개를 제외하곤 냉방시설이 일절 없었고, 전기를 사용하는 기구는 추가금을 내야 했다. 그 습한 더위 속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캄보디아 남성들이 웃통을 벗고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차마 탈의할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저렴한 가격으로 현지 헬스장 만의 날것의 매력을 한 껏 느끼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한증막 같은 더위에 현기증을 느끼며 가까스로 50분 정도 운동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끝내고 저녁 식사를 위해 나가려고 하니 헬스장 갔을 때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다.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구글 맵으로 가까운 식당을 검색해 보았다. 검색하여 나온 식당 중 이거다 싶은 곳이 보이지 않아 이번에도 항상 쓰던 그 방법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숙소 바로 옆이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골목을 대략적인 목표 위치로 정하고 가보았는데, 막상 가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유흥 거리가 나왔다. 거리 양옆으로 술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여러 명의 여자들이 동시에 빽빽 고함을 지르며 호객하는 것이 무서우면서도 신기했다. 이런 방식의 호객은 처음 경험한 거였다. 수십 명의 고함소리를 듣고 나서야 가까스로 지역 주민들로 가득한 술집 겸 식당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들어가서 메뉴판 먼저 확인해 보니 대부분이 맥주 안주 위주였지만 다행히 반가운 사진 하나가 끼어있어서 맥주 한 캔과 함께 그것으로 바로 주문을 하였다.(식당 구글 맵 링크: https://maps.app.goo.gl/5nHRSo8XpayuCGu16)
다행히 이번에도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어제 소매치기당한 후 흔들리는 멘탈 속에서 충동적으로 예매한 씨엠립행 버스가 당장 내일 점심이었기 때문에 프놈펜에서의 마지막 밤을 이대로 숙소로 돌아가 보내기엔 뭔가 아쉬웠다. 마침 톤레삽 강변이 멀지 않았기에 비 내리는 강 풍경을 보며 마무리하기로 했다. 강과 거리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자니 오늘이 프놈펜에서의 마지막 밤이라는 게 아쉬워졌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를 풍경이라 열심히 두 눈과 카메라에 담아보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한 아마추어 여행기입니다. 부정확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니 유의해서 재미로 읽어주시고, 궁금한 내용은 댓글 남겨주시면 답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