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최고의 친구 사이

나의 마음도 다스리기

by 소담

휴직 후 진진이의 상태와 별개로, 이른 시간에 매일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내 마음을 가볍게 했다. 아이를 등교시킨 후 오전을 나만의 시간으로 충분히 쓰고 나면, 진진이가 하교했을 때 훨씬 부드러운 대화가 가능했다. '진진이 때문에 엄마가 회사까지 그만둔다'라는 생각보다, ' 진진이 덕분에 엄마가 빨리 회사에서 해방될 수 있었네' 란 생각으로 접근하려 했더니 오히려 내 행복감도 커졌다.

하교 후 편의점으로 뛰어가 크림빵을 4~5개라도 먹어치워버리고 싶어 하는 진진이의 폭식 욕구를 잠재우기 위해 늘 학교 앞으로 데리러 갔고, 저녁엔 소소하게 산책하며 불안함을 함께 다독였다. 여름이 시작되려는 계절의 따뜻하고도 선선한 밤공기는 우리에게 깊은 평온함을 안겨 주었다. 우리는 5년 전 홍콩의 밤거리로 돌아간 듯했다.

진진이가 초등 2학년 때, 우리 가족은 남편의 발령으로 1년 반을 홍콩에 머물렀었다. 나는 출산 후 처음으로 장기 휴직을 하며 국제학교에 다니는 진진이를 돌보았고, 남편은 한국보다는 릴랙스 한 분위기에서 일하는 것이 가능했다. 진진이 출산 후 단 3개월 만에 복직하였던 나는, 아이와 나눈 물리적 시간에 대한 부족함이 마음 한편에 남아있던 터였다. 습하고 더운 낯선 그 나라에서 우리 세명은 손 꼭 잡고 많은 순간을 같이 했고, 그 덕분에 '함께 보낸 시간'에 대한 죄책감에서 비로소 나는 해방될 수 있었다.

홍콩에 머물며 여행을 참 많이 다녔는데, 국제학교 특성상 중간방학이 많아 진진이와 단둘만의 여행도 종종 시도했었다. 출근해야 하는 남편은 두고, 우리 둘은 3-4시간이면 가는 싱가포르나 인도네시아로 훌쩍 떠나기도 했고, 몇 주간 계획을 세워 프랑스에 다녀오기도 했다. 젊은 동양인 엄마와 꼬마 소녀의 여행은 오히려 안전했었다. 어딜 가나 여자 둘은 배려받았고, 초등 2학년 생인 진진이는 대부분의 장소에서 막내로 예쁨을 받았다. 파리에서 홍콩으로 돌아오는 여정에서 기체 결함으로 비행기가 하루나 지연되었는데, 그 24시간을 불안함 없이 기다릴 수 있었던 것도 어리지만 씩씩했던 진진이와 무모할 만큼 용감했던 나의 꿀조합 덕분이 아니었을까.

중1이 된 진진이와 홍콩에서처럼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고 있노라니, 떠올리며 이야기 나눌 추억이 많다는 사실에 참 행복했다. 여름방학 동안 우리 모녀는 많이 걷고 이야기 나누고 웃었다. 장마철만 되면 떠오르는 홍콩의 습함이며, 몽생미셸에서 본 해 질 무렵 만조의 장관도, 싱가포르 센토사섬의 경쾌한 분위기까지, 샘솟는 추억에 우리 머리가 찡해지는 듯했다. 훗날 우리가 함께 보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리면 어떤 기분이 들지, 문득 궁금해졌다.

방학이 시작되고, 규칙적인 식생활과 함께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는 딸을 바라보며, 이제 곧 나을 거라는 희망이 우리 집 대문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keyword
이전 08화20년 만의 회사생활이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