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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만의 회사생활이여 안녕

이제 퇴사하겠습니다

by 소담

2003년 11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우리나라 최고 호텔이라는 ** 호텔에 입사했다. 학부 시절 내내 바랬던 일이었고 힘든 과정을 거쳐 입사해서 마치 꿈을 이룬 듯 처음엔 매우 기뻤으나, 호텔 일은 내가 생각했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입사 1년 만에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고, 전 직장의 타이틀 덕에 더 복지가 좋은 정유회사로 이직에 성공했다. 진진이 출산 후, 점점 세지는 업무 강도 때문에 다시 5년 만에 외국계 금융회사로 직장을 옮겼고 약 15년간 근무 중이다. 20여 년 사회생활 동안, 대기업이란 포장지에 싸여 꽤 안정적인 경제활동을 했다.

2024년 4월은 진진이가 중2가 되는 때이기도 하고, 내가 진진 교육비 타깃으로 정해놓은 장기 저축이 종료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내 나이도 45세, 손녀 돌보느라 고생하신 우리 엄마 70세가 끝나는 해이다. 내 인생 1막 종료와 엄마의 손녀 육아를 졸업하는 졸업장을 2024년 4월 자로 찍으려 했다. 모두에게 수고했다고 손뼉 치면서.

1막 종료 후 2막에서는 경제적 부분보다 정신적 부분에 힘을 쏟고 싶었다. 다행히 나보다 경제활동이 활발한 남편이 있기에, 좀 릴랙스 하게 하고 싶었던 취미 생활과 종교 생활,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들 서포트에 시간을 쓰고 싶었다. 회사에서 하는 경제활동도 보람 있고 소중했지만, 사무실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책상 앞에 있다 보니 내가 놓치는 다른 일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한 달마다 어김없이 주어지는 급여는 참으로 감사했지만 내 귀한 시간의 가치에 대응되지는 못했다.

그렇게 퇴직일을 카운트다운하려고 하던 차에, 우리 진진이에게 시련이 닥쳐버렸다. 회사 생활이 주는 스트레스와 성취감, 그 둘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던 내 고민의 시간도 딸의 병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엄마에게 소소히 반항하는 가벼운 사춘기를 예상했건만 우리 진진이에게는 건강을 위협하는 섭식장애가 찾아와 버렸고 , 지켜봐 주는 가족들이 물론 많지만, 복잡한 아이의 마음을 제일 잘 읽고 돌봐줄 수 있는 건 엄마인 나이기에, 계획보다 빨리 퇴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진진이의 예민함과 거식 성향이 극을 달하던 5월 중순, 의사 선생님의 '가족의 보호관찰이 상시 필요하다'란 진단서를 첨부해 일단 휴직계부터 제출했다. 회사에서 줄 수 있는 휴직은 6개월이었고, 11월 말까지 아이가 완치한다는 보장은 없었기에 나는 휴직과 동시에 퇴직 준비자가 되었다.

회사를 관두겠다고 하면 많은 사람이 두 가지를 묻는다. "아깝지 않냐?"와 "앞으로 뭐 할 건데?". 매월 채워지는 통장 잔고뿐 아니라, 가족 건강검진과 휴가철 콘도 이용 등, 아까운 게 한두 가지이겠냐만은, 이런 물질적 안정감에 지금 내 가족의 행복을 저당 잡힐 수는 없는 상태이다. 앞으로 뭘 할지에 대해서는 "나 이제 가정 챙기며 좀 놀래"라고 답하고 싶은데, 이걸 말할 수 있는 대상은 가족과 일부 친구들뿐이라 안타깝긴 하다. 잘 살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마음속으로만 대답을 한다.

현재 퇴직 준비 6개월 차, 공식 퇴직을 몇 주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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