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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를 잘 겪어내지 못한 성인은 어떻게 될까

인간에 대한 이해

by 소담

남편과는 연애 3년, 결혼 16년 차를 지나 내 인생 절반 가까이를 함께 지내고 있다. 남편은 무뚝뚝함과 유머러스함을 동시에 가진 츤데레 스타일로, 연애기간과 신혼 때 다이내믹한 이벤트와 소소한 기쁨을 동시에 주어 참 즐거웠지만 한 번씩 뿜어져 나오는 불같은 성격은 나를 힘들게 하곤 했다. 평소에는 이성적이고 사리분별 명확한데, "화" 버튼이 눌리는 순간 뻥 터져버리고 말았었다. 그 화 버튼을 돋우는 건 바로 나였으니, 나도 한참 어리고 어리석은 시절이었다.


다행히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남편의 성질이 많이 죽었고, 나도 마음이 꽤 너그러워지면서 큰 부딪침 없이 지내고 있다. 그렇지만 남편의 스트레스가 내/외부에서 축적될 때면, 한껏 부풀린 풍선에 작은 바늘을 댄 듯 펑 터지는 순간이 생기고 우리 부부관계도 그에 따라 업다운이 있다.


최근 진진이 치료를 시작하며, 진진이의 아빠 의존도가 굉장히 높아졌었다. 부녀가 성격이 비슷하고 워낙 남편이 진진이에게 다정했어서, 딸은 나를 통해 얻은 억울한 감정을 아빠에게 위로받는 식이었다. 섭식장애에 대한 이해도도 다른 아빠들보다 월등히 높아, 가족 치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겠거니 했다. 남편은 아이를 전담 간호하는 나에게도 위로의 말을 자주 건네주어, '부부관계는 결국 측은지심이 크게 작용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섭식장애 회복기로 접어듦과 동시에 진진이에게도 일반 사춘기적 반항 요소가 나오게 되자, 부녀가 한 번씩 충돌하기 시작했다. 충돌은 단순한 부녀 다툼에서 끝나지 않고, 두 개의 큰 화산이 한 집안에서 폭발해 버리는 듯한 상처를 남겼다. 13년 동안 그렇게 다정했던 부녀가 한 달 동안 두 번을 크게 부딪혔다.


진진이는 13년 만에 보는 아빠의 "BIG 난리"에 분노하고 두려워했다. 남편은 본인의 화 버튼을 건드린 외부 환경에만 집중하였고, 본질을 해결하지 않고 상황을 덮어버리고 싶어 했다.


아이에게 큰소리를 쏟아버리고 괴로워하고 있는 남편을 보고 있는데, 이런 상황을 몇 번 경험해 본 나에게 남편을 향한 안쓰런 마음이 올라오더니, 놀랍게도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남편은 강하고 억압적인 부모의 무관심 속에 애정결핍을 갖고 자라난 사람이었다. 사춘기는커녕, 어떤 상황에서도 그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하며 몸과 마음이 가난한 유년을 보냈다 하였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본인이 가진 완벽주의적 성격 때문에,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지금까지 고군분투하였고, 쌓이는 스트레스를 현명하게 해결하는 방법을 아직 잘 모른다. 지금 우리 진진이에게는 과할 정도로 몰입하고 도와주는 엄마인 내가 있는데, 10대 때의 어린 남편은 그 거칠고 힘든 시기에 아무도 없었겠구나. 그때 뭉쳐진 화가 지금에 와서 불쑥불쑥 나와버리는 거구나.


때와 장소를 모르고, 상대가 누군지 숙고할 틈 없이 튀어나와 버린 남편의 화가 더 이상 밉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내가 진진이를 보듬어 주는 것처럼, 남편도 안아 주어야겠다... 남편이랑 만난 지 20년이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든 큰 깨달음이었다.


남편은 그날 밤, 본인도 진진이 다니는 병원에 상담을 가 보겠다고 했다.


진진이에게도 고백했다. "진진아, 아빠도 마음의 병이 있는 것 같아. 우리 딸도 열심히 지금 마음상태를 치료하는 것처럼, 아빠도 고쳐볼게"


한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자존심 상하다고 생각되었던 내 젊은 시절이 있었다.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걸 내려놓고 딸을 이해하고 도우려는 노력을, 왜 남편에겐 쏟지 않았던 걸까. 남편 어린 시절의 부모님을 원망하기 전에, 지금 내 차례가 왔을 때 아낌없이 사랑해 주자.


우리 가정에 또 한 겹의 먹구름이 걷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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