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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너를 힘들게 했니?

모성과 섭식

by 소담

두려움이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던 10월 중순, 진진이는 학교 체험학습을 다녀왔다. 1학기 체험학습 때 도중에 소환되었던 기억이 있어, 이번에도 잘 다녀올 수 있을까 긴장했으나 다행히도 무사히 잘 다녀왔다. 문제는 귀가 후였다. 일정에 있던 수학 과외를, 시작 직전에 너무 하기 싫다고 떼를 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시는 중이셨다. 선생님 앞에서도 내 얼굴이 화끈해질 정도로 역대급 짜증을 내기 시작해, 1시간 반으로 예정되었던 수업을 1시간으로 간신히 마쳤는데, 수업 후에는 수학 수업이 너무 괴롭다며 더 큰 "BIG 난리"를 쳤다.(화산 폭발이라고 표현하면 맞으려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모범아기였던 우리 진진이는, 어릴 때 내 앞에서 심하게 떼를 쓴 기억이 거의 없었다. 조카 땅콩이를 늘 친언니처럼 챙겼고, 이른 아침 출근하는 엄마 때문에 매일 새벽에 깨어 할머니 댁으로 건너가야 하는 상황에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던 의젓했던 진진이. 그랬던 아이가 중학생이 된 지금에 와서 울며 불며 난동 수준의 액션을 하고 있는 걸 보니 갑자기 아이가 안쓰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리 진진이, 어릴 때 못쓴 떼를 지금 부리는구나"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진진이의 뾰족했던 눈빛이 나른하게 변하더니, "엄마, 나 어릴 때 떼쓰고 싶은데 참아서 힘들었던 적이 많아.." 하며 펑펑 울기 시작했다. 급작스런 고백과 그치기 힘든 울음. 한참을 화장실에서 울면서 주저앉아 있더니, 세수를 하고 나와, "엄마, 나 한 번씩 감정 조절이 힘들 때가 있어... 그럴 때마다 엄마가 옆에서 토닥여줘"라고 말하는 딸.

머릿속을 큰 망치로 꽝 맞은 기분이었다.
섭식장애 전문병원에 가기 직전, 답답한 마음에 사춘기 심리상담 센터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상담사는 나에게, 섭식은 모성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하며, 진진이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 먼저 돌아봐야 한다고 했었다. 상담사는 진진이가 엄마 사랑에 결핍이 있을 거라고 단언했다. 그 당시 나는 우리 모녀사이에 문제가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그분의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아 상담을 지속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진진이가 지금 고백하고 있다. 엄마 앞에서 모범아기이고 싶어서, 떼쓰고 싶은 걸 참았었다고. 그 쪼꼬미 때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이제야 터진 감정은 어디로 보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진진이 출산하고 3개월 후부터 복직한 전형적인 직장맘이었고, 진진이의 주 양육자는 태어난 순간부터 친정 엄마였다. 엄마는 동갑내기 조카 땅콩이도 진진이와 함께 돌보셨는데, 진진이보다 10개월이 늦게 태어난 예민한 땅콩이는 샘도 많아서 진진이를 한 번씩 괴롭혔고, 진진이는 언니 마음으로 그런 땅콩이를 감싸주며 본인의 속상함은 참곤 했었다. 땅콩이 가 어른들께 혼이 나는 게 싫어서. 그런데 본인도 땅콩이처럼 떼쓰고 싶었다고 이제 와서 털어놓는 것이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 어른스럽게 굴려고 노력하는 아이는, 언젠가 마음이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왜 그땐 몰랐을까. 나와 진진이, 그리고 섭식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가 서서히 보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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