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워주신 엄마는 알고 보니 생모가 아니란 걸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거나, 불치병이라도 걸려 내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헤어진 애인이 나와의 이별을 괴로워하다가 사고로 크게 다쳤거나?
친구들과 밤새 진실게임이라도 하게 되면, 모두의 잠을 확 깨울만한스토리가 나에게도 있기를 바랐다. 실제로, 누구의 부모님은 엄마의 불륜이 발각되어이혼하셨댔고, 누구는 태어나보니 심장병이라 달리기를 여태껏 못한다 고백했으며, 누구는 아빠 사업 실패로 집안의 온 가구에 빨간딱지가 붙는걸 직접 경험해 봤다고 했다. 내 기준으로 평범하지 않은 사연을 누구나 한두 가지가지고 있는 것 같아 막연히 멋져 보였다.
얼마나 어리석고 교만했었는지!
지금은 매일밤,
부디 내일은 평온하기만을 바라며 잠을 청한다. 나와 내 가족이 아무 일 없는 내일을 보내길 기도한다. 속 시끄러운 일이 없다시피 한 내 유년과 청년시절에 한없이 감사하며, "지랄 총량의 법칙"이 누구에게나 적용된다면, 40대가 된 후 2~3년간의 내 삶은 지랄 발광의 연속이 아니었냐고, 이제 제발 이 혼란을 좀 거두어 주시라고 신께 간청한다. 이렇게 빌어온 지 1년도 더 된 것 같은데, 자꾸만 지랄의 수위가 신기록을 달성하는 것을 느끼며, 나한테 왜 그러시냐고 신을 원망하기도 한다.
내 아이의 사춘기는 좀 고단하다. 섭식장애로 시작한 불안장애가사춘기 시기와 만나,꽃같이 여리고 곱던 아이가 참 많이도변했고아주 힘들어한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은 늘 긴장모드이다. 가끔 잔잔함 속에 행복을 찾기도 하지만, 무언가 사건이 생기면 자기만의 감정 절제선에 치닿고 만다. 사건이 생기는 빈도가 많아지면, 날카로운 칼날을 세우게 된다. 나도 많은 엄마들처럼 푸근하게 포용해 주려고 노력하지만, 또 여느 엄마들처럼 괴팍한 본성이 나와버린다.
그래서 가족상담을 시작했다. 부모관계와부부관계에서생겨난뾰족한 바늘들을 좀 뭉뚝하게 만들어 보려고.
초반상담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놀랍게도 나조차 내 감정을 잘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당연히상대방의 감정은 알기가 더어렵다. 주로 상대의 행동에만 초점을 두어, 그 행동이 어떤 감정에서 기인하였는지생각이 미치질 않는다.
어느 날 상담사가 아이가 내일 학교 가기 싫다고 말하며 갑자기 울면서 방에서 나오면뭐라고 반응할 건지 물었다.
나는 오랜 생각 끝에 "왜 가기 싫어?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라고 물을 거라고 했다.
남편은 같은 질문에,
"어이구 그래? 그럼 가지 마, 안 가도 돼"라고 답할 것 같다고 했다.
우리 부부의 대답에 상담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말들 중에, 아이의 감정은 어디 있나요?"
...
모범적인 대답은,
"아이고 ●●가 학교 가기 싫구나.."(공감)
"얼마나 힘이 들까?" (또 공감)
"아휴 어떡하니.." (한번 더 공감)
"엄마아빠가 어떻게 도와줄까?"(스스로 생각하고 행동을 결정하게 함)
휴... 정말 저게 정답이라고? 반발심이 생긴다.
내 반응도 완전 오답은 아니지 않냐고! 남편처럼 말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상담사는 거침없이 말한다. 어머님의 반응은 아이의 감정은 무시하고 행동에만 초점을 둔 것이라 아이에게 위로가 되어주지 못할 것이고, 아버님의 대답은 아이에게 선택을 할 자율성을 주지 않아, 저러한 반응이 쌓이면 아이는 자립심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허무하다.
듣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알았으면 나도 분명 그리했을 테지만, 나는 정말 몰랐다.
내가 고심하고 던진 아이를 향한 친절한 말들이 어쩌면 털끝만큼의 위로가 되지 못할수도 있었다는 사실이뼈아프다. 이런 내 마음은 공감도 안 해주고 팩폭을 날리는 상담사가 야속하다.
남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인지 덧붙였다.
"뭐, 우리 다 알고 있는 뻔한 얘기 아닌가요? "
(그런 말을 왜 하니 남편 -*-;;)
상담사는 말한다.
"사람들은 알면서도잘 못하는 경우가 참 많죠."그러면서 상황극을 통해 실제 저 말들을 해보기로 한다. 10분간 우리 부부는 공감의 말들을 연습해 본다. 입 밖으로 꺼내보니, 우리 부부가 하던 말습관이 아니었단 것을 느낀다. 나는 언제나 행동과 결과(그래서, 진짜 학교 안 간다고? 까지.)를 중시했던 것 같고, 남편은 허용적인 척 무심했다.
며칠 후, 아이가 "공부하기 싫어"라고 징징대기 시작했다. 옆에서 보던 남편이 당황하지 않고 연습한 대로 말했다. "아휴 어쩌냐? 정말 싫겠다.. 아빠도 내일 회사 가서 일하기 싫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