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을 쌓는 사람들

이기심과 자아

by 사나래

10년 전, ‘노아’라는 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실감 나게 그려낸 작품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으로 성경이야기가 탑재되지 않은 제 머릿속은 성경이야기가 전체적으로 연결이 되지 않고 여전히 들을 때마다 새로운 단막극처럼 느껴졌습니다. 저에게 10년 전은 대쟁투 총서를 다 읽었어도 성경이야기가 단막극이긴 매한가지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영화는 산속에 거하던 므두셀라가 손주며느리를 축복하는 장면 직후, 비가 내리면서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므두셀라와 노아를 따로 알고 있던 나에게는 그 장면이 신기할 따름이었고 홍수가 시작되면서 죽어가던 므두셀라가 시간이 흘러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을 만큼 내게는 새로움이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

최근 우리 부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므두셀라의 이름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부조와 선지자』의 홍수 부분을 읽고 있던 터라, 그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이 “그가 죽으면 심판이 시작된다”, “그가 죽으면 세상의 끝이 온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때 영화 ‘노아’의 첫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제 안에서 성경 이야기의 한 부분이 확실하게 정리되었습니다. 참고로 므두셀라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다 못해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 하늘로 데려가신 에녹의 아들입니다. 므두셀라가 태어날 때, 에녹은 하나님께서 그 아이의 생애를 통해 홍수 심판을 예고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더욱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고, 결국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므두셀라가 969년을 살고 죽었을 때, 그 해에 홍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죽으면 심판이 시작된다.”


그 이름의 뜻대로, 세상의 끝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창조 초기인 무렵에, 그 아름다웠던 지구를 굳이 홍수로 쓸어버리셨을까 한때 저는 의아했습니다. 아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이유가 그분의 사랑과 자비 때문이었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홍수의 시작과 끝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홍수 이후, 하나님의 섬세한 뒷수습

홍수 이야기에서, 저를 가장 흥미진진하게 몰아갔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홍수 뒷수습이었습니다.

저주가 임하여 수많은 사람과 동식물이 죽어 자칫 아수라장 같은 모습이었을 이 땅에 하나님께서는 광풍을 일으키시어 물을 빠르게 말리시고, 그 힘으로 죽은 것들을 따로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매장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장엄하고도 신비로운 순간이었을 것입니다.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때 죽은 것들만 매몰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홍수 이전에 주셨던 수많은 보물들, 이를테면 보석이나 금과 은, 귀중한 목재들도 함께 땅속에 묻혀 버렸다는 것입니다(부조, 108).

만약에 세상이 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 죄악의 창궐이 없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아름다운 지구별에서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 사실을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홍수가 지나가고, 지구상에서 죄를 모조리 쓸어버리셨지만, 인간의 죄성을 향한 본성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또다시 홍수 이전의 삶으로 회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직접 홍수를 겪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홍수를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무지개의 언약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오직 홍수에 대한 두려움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러다가, 또다시 일을 내고 맙니다.


바벨탑을 건설하려는 인간의 계획

그들은 스스로 생명을 보존하고, 자신들의 앞날을 지키기 위해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시기는, 아직도 사람의 수명이 수백 년씩 유지되던 때였고, 키도 우리의 평균 신장보다 서너 배는 컸던 시기였습니다. 그들은, 탁월한 지혜를 가지고 스스로 살 길을 마련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바벨탑을 건축하기로 결정합니다.

이 거창한 프로젝트는, 단순한 건축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홍수가 왜 일어났는지 규명하고, 홍수로부터 지구를 구하자는 원대한 꿈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의 이면에는 다른 속내가 감춰져 있었습니다. 높은 탑을 건축한 자기들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속내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몸부림,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후세를 위하여 남겨두고자 했던 무모함도 같이 계획되었다.(부조, 119)

즉, 그들의 바벨탑 건축은 자기 이름을 높이려는 교만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완강한 반항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뜻대로 살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스스로 홍수의 재앙을 피할 방법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멸하신 것은 홍수가 아니라,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진짜 문제는 물이 아니라, 죄악의 깊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외면한 채, 스스로 구원자가 되려는 무모한 몸부림을 쳤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아름다운 지구와 셀 수 없는 축복들은 외면한 채, 사람들은 오직 홍수를 통한 세상의 멸망만을 가혹하다고 여기며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은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만 원망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사상이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결국 도덕과 윤리는 사라지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그들은 심지어 자녀들마저 제물로 바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끔찍한 죄악이 만연했기에, 결국 하나님의 개입은 자비로운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인류는 자신들의 죄악으로 스스로 파멸을 자초했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바벨탑을 쌓으려는 계획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저지되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미래를 지키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그들이 더 이상 하나 되어 죄악을 도모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그리하여,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바벨탑의 계획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바벨탑의 실패는,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자비의 개입이었습니다. 죄로 끝없이 타락해 가던 인류를, 더 깊은 절망으로부터 보호하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바벨탑 건설자들의 계획은 수치와 패배로 끝났다. 그들의 교만의 기념비는 그들의 어리석음의 기념비가 되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여전히 동일한 노선-자아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배척하는 노선-을 따르고 있다. 그것은 사탄이 하늘에서 실천에 옮기고자 하던 원칙이요…”(부조, 123).



내가 쌓고 있는 바벨탑사람이 바벨탑을 쌓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동안, 즉 젊고,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고, 세상이 만만하게 보일 때는, 자아를 내려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 힘으로 충분하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하나님보다 스스로를 더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아를 내려놓지 않는 모든 순간, 우리는 바벨탑을 쌓고 있는 셈입니다.

내 힘으로 구원을 이루려 할 때, 믿음은 마치 쥐구멍 속에 숨은 듯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은, 나이와 함께 자라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는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고, 그제야 믿음의 필요성을 깨닫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을 겪기 전에, 이미 우리 곁에서 개입하고 계십니다.

바벨탑 건설을 막으셨던 하나님의 개입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진정으로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끝없이 스스로를 높이려 하고, 자신의 계획과 능력만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바벨탑을 멈추게 하십니다. 그것이 징벌이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개입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스스로 쌓고 있는 바벨탑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개입하시도록 겸손히 내려놓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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