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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성일 Jan 10. 2019

제15회 - 우리 정서와 한국 뮤지컬 (3)

 이제 ‘우리 정서’에 대해 이야기해본다. 우리 정서란 전통적인 정서를 말하는 것인가, 한국적인 정서를 말하는 것인가? 우리의 것이란 전통적인 것인가, 한국적인 것인가? 


 폭로부터 하자면, ‘우리 정서’를 강조하면서 ‘우리 정서에 맞는 뮤지컬’을 해야 한다는 그 말속에는 음모가 숨어 있다. 도전이 아닌 안전함을 추구하는 이들의 구실인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면서 정작 올리는 ‘우리 정서’에 맞는 작품은 그저 무난한 뮤지컬 작품이더라는 것이다. 무난한 작품. 두루두루 어느 정도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만한, 그냥 그저 그렇게 올려도 무난하게 공연되는, 희곡에 노래 몇 곡 적당히 넣어서 창작 뮤지컬이라고 하는 작품. 그 얼마나 비열한가? 그들에게 우리 정서에 맞는 뮤지컬이란 무난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무난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뮤지컬이다. 그래서 그들은 익숙한 것을 찾는다. 현재 가장 유행되는 스타일, 요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소재를 가져온 작품... 그렇게 자신에게 낯설어서 실패할까 두려운 것에는 ‘우리’라는 다른 이들을 끌어들인다. ‘우리 정서’라는 말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회피하는 핑계로 자주 쓰인다.

 공연 예술은 낯선 것을 만나서 그것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그것을 체험하면서 감동을 만들어낸다. 물론 우리가 내용적 감동을 받을 때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을 때라기보다는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을 확인시켜줄 때이다. 하지만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이라는 것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익숙함은 아니다. 결과로써 확인되는 것이고 새롭게 체험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어떤 예술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는 이들이 익숙한 ‘우리 정서’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들에게 감동을 준 작품들은 도리어 낯설거나 먼 나라의 것들이 더 많았다. 작품을 창작해낸 사람의 독특한 시각을 엿보고도 감동을 느낀다. 그 표현 양식이 우리의 전통적인 양식과 완전히 달라도 감동을 느낄 수 있다. 그런 경험을 해본 일이 있는가?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외국 사람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은 때. 그런 경우 나나 상대방이나 즐겁게 웃는다. 농담 자체는 그리 재치 넘치는 것이 아닐지라도 서로 이해했다는 것 자체에서 즉, 소통을 했다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면서 웃는다. 공연예술도 그런 소통과 관계가 있다. 공연예술인 뮤지컬을 보고 감동을 받는 것은 집단의 군중심리보다는 소통과 관계가 있다. 관객이 많을수록 커다란 에너지가 생기고 그 때문에 더 큰 감동을 받곤 하지만 내 옆자리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난리를 쳐도 나는 전혀 감동이 없을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시라. 뮤지컬 보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면 왜 그랬는지. 전통적이니까?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한 검증된 작품이니까? 창작 뮤지컬이니까? 그런 표면적인 것들은 감동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예술은 그런 표면적이거나 이기적인 ‘우리 정서’를 뛰어넘는다. 그저 인간의 정서일 뿐이다. 만일 그들이 말하는 우리 정서의 조건에 부합하는 예술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예술이라면 예술가들 중 대부분은 창작 행위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뮤지컬을 제작하려는 것을 두려워하는 어떤 제작자들은 창작 뮤지컬 대본과 음악을 검토하고 나서 자신이 없으면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핑계를 대면서 제작을 포기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해외 뮤지컬은 수입해온다. 그 해외 수입 뮤지컬들은 그들이 말하는 우리 정서와 맞는 것일까? 간혹 관객들이 그런 뮤지컬을 보고 감동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유는 ‘우리 정서’에 맞기 때문이 아니다. 간혹 실패하는 경우도 그들이 말하는 ‘우리 정서’에 맞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더러 수입 뮤지컬 중에는 ‘우리 정서에 맞게’ 고쳐서 공연하는 작품도 있는데 그 작품의 성공 여부가 ‘우리 정서에 맞게’ 고치는 것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우리 정서에 맞는 뮤지컬을 창작하고 제작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작가와 작곡가에게는 새로운 뮤지컬을 쓰기 위한 동기가 되지 못한다. 예술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자신의 세계에서 창작을 시작한다. 의무감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믿는 신념을 표현해 보이는 것일 뿐이다. 우리 정서에 맞는 뮤지컬을 써야 한다는 얘기로 창작 행위의 ‘고통스러운 즐거움’에 상처를 줄 필요는 없다. 


 한국 뮤지컬은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규칙을 지키면서 따라가야 하는 이상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뮤지컬이 한국 뮤지컬이다. 한국 연극, 한국 뮤지컬은 어떤 이상향이 아니라 현주소이다. 나는 한국적인 뮤지컬이 우리 뮤지컬이라고 생각한다. 그 소재나 주제가 반드시 전통적일 필요도 없다. 전통문화를 곁들여도 좋다. 한국 뮤지컬은 다양한 모습을 가진 많은 작품들이 만드는 전체 모습이다. 한국 뮤지컬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방향을 한 곳으로 지정하고 그곳으로만 가야 한다는 것은 권력을 원하는 어떤 이들의 음모일 수도 있다. 바로 그런 이들이 우리 정서를 강요한다. 


 나는 한국의 뮤지컬 작곡가와 작사가들에게 작품을 쓸 때 우리 정서보다는 창작인 개인의 정서에 솔직해지라고 말하고 싶다. 구체적 실체가 없는 우리 정서에 맞는지를 먼저 계산하지 말고 자신이 예술가로서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라는 것이다. 한국 뮤지컬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두려워하지 말고 창작인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창작인으로서 우리 정서를 따라가지 말고 나의 정서를 따르라. 상식이 아닌 직관을 믿어야 한다.


 미국의 가장 성공적인 소설가 중 한 명인 스티븐 킹(Stephen King)이 자신의 삶과 창작에 대해 쓴 책 『유혹하는 글쓰기(On Writing)』(김진준 번역, 김영사, 2002)를 통해 말한다. “무엇에 대하여 쓸 것이냐? 이에 대한 대답도 질문 못지않게 거창하다. 여러분이 쓰고 싶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정말 뭐든지 좋다. 단,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영국의 연극 연출가이자 연극 철학가인 피터 브룩은 그의 책 『열린 문(The Open Door)』(허순자 번역, 평민사, 1996)를 통해 말한다. “연극은 어떤 구분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것은 다만 삶에 관한 것일 뿐이다. 이것이 유일한 출발점이며, 그밖에 진실로 근본적인 것이란 없다. 연극은 삶이다.” 그리고 “작품을 올리는 이유들은 보통 불분명하다. (중략) 수천 가지의 잡다한 이유들이 나올 것이다. (중략) 상상할 수 있는 설명들이 수없이 많기는 하지만, “그 주제가 삶의 본질적인 문제나 관객의 필요를 다루는 데 성공할 수 있는가?”라고 하는 우선되는 이슈와 비교해 볼 때 부차적인 것들이다.” 또,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A. W. 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 목사의 설교들을 모아 편집한 책 『세상과 충돌하라(Zozer Speaks to Student』(이용복 옮김, 2005, 규장)에 담긴 그의 말, “상대적으로 새것이니 옛것이니 하는 논쟁은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진리 앞에서 무의미하다.” 예술가는 자신이 믿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지 남들이 정해놓은 사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아니다.  


 거의 모든 명작은 창작인의 개인적 예술혼으로 시작되었다. 물론 제작자의 제안에 맞추어 작업을 해서 명작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사람들에게 관람표를 많이 팔 수 있을 거야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제작자로서 대박을 내고 싶다면 무난한 작품보다는 그 작품에 반영된 창작인의 개인적 비전이 있는 작품을 선택해야 한다. 명작을 탄생시킨 예술가들이 보통 사람들의 그 무난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고 생각하는가? 예술가는 그 이상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예술가는 누구나 생각하는 진부한 시각을 통해 표현한 작품을 창작하지 않는다. (관객이 좋아하지 않아도 창작인의 예술혼을 고귀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자세로는 협력 예술이고 관객을 만나는 것이 최종 목표지점인 공연예술을 할 수 없다.) 지금은 은퇴한 동국대학교 이창배 명예교수는 역시 자신의 저서 『시 이야기』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시인은 역사의식에 충실해야 한다.” 그리고 “시인은 본질에 충실하고 그것과 맞대면하는 정직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관객이 무난한 작품을 원한다고 착각하지 마시라. 놀랍게도 관객은 무난한 작품보다는 예술가의 고집이 빚어낸 진국을 원한다. 한국 관객들은 참 착하다. 매번 속으면서도 수고했다고 손뼉 쳐주고 다음에는 이런 거 말고 진짜 작품이 나오겠지 하면서 기다려주고 있다. 그 박수를 증거로 이번 작품이 걸작으로 증명된 것 아니겠냐고 한다면 깨어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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