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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DA Nov 24. 2022

폴란드의 소중한 보물이 된 초상화

; 담비를 안은 여인

  


한참 사랑에 빠진 소녀는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띤 채, 솔직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화폭 너머의 누군가를 응시하고 있다. 사랑받는 이의 충만한 자신감이 그림 밖으로도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Dama con l'ermellino, 1488-90 ca.


고개를 돌려 갑자기 방으로 들어온 누군가를 쳐다보는 순간을 포착한 듯, 자연스러움이 돋보이는 초상화 속 여인의 시선 끝에는 누가 있었을까?







Leonardo da Vinci 4대 여성 초상화, 그 두 번째


그녀의 초상화는 동시대 여느 여성 초상화와 구별되는 강렬함이 있다.
Leonardo da Vinci의 밀라노 시대라 일컫는 1482년에서 1499년 사이, 그는 두 점의 여인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중 하나인- 후대에 [Dama con l'ermellino]*라 이름 붙여진 이 초상화는 그가 밀라노의 궁정화가로 활동하던 초기에 그린 것으로, 당시 밀라노 공국의 실질적인 공작** Ludovico Maria Sforza(Il Moro)에게 의뢰받아 그린 당대 최고의 ‘심리적 초상화’다.


*'담비를 안은 여인' 혹은 '흰 족제비를 안은 여인', 담비(Ermellino)는 북방 족제비의 흰 겨울 털

**Ludovico는 조카인 공작 Gian Galeazzo Maria Sforza를 대신해 섭정을 하며 실질적인 공작이 됨



Cecilia의 시선과 은근한 미소


Leonardo가 처음 심리적 초상화를 시도한 [Ginevra dè Benci]에서 Ginevra의 초점 흐린 시선에 담겨있던 영혼의 움직임은, Cecilia의 초상화에선 반대로 또렷한 시선과 옅은 미소에 집중되어 있다.

Cecilia의 얼굴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듯 눈에 띄지 않는 미소가 입술에 맴돌고 있는데, 다빈치의 여성 초상화 중 가장 유명한 [Monna Lisa(모나리자)]의 신비로운 포인트로 꼽히는 ‘웃는 듯 아닌 듯한 미소’는 10년도 더 전 Cecilia의 초상화에서 먼저 시도되었다.



담비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
Leonardo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한 대 맞으면 아플 것 같은 근육질의 다부진 체격을 가진 담비는 사실 처음부터 존재하지는 않았다.

상징성을 담아 그림 속에 주인공에 대한 단서들을 숨겨놓는 Leonardo가 이번에 선택한 것은 담비였다. 그리스어로 Galèe인 담비는 여인의 성 'Gallerani'를 암시함과 동시에 여인의 애인인 밀라노의 실질적인 공작 Ludovico를 상징하는 동물로, 화가는 공작과 정부가 함께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없는 대신 Ludovico를 상징하는 담비*를 그려 넣어 표현했다.


*초상화가 그려지기 직전 Ludovico는 나폴리 왕으로부터 Ermellino(담비) 기사단 명예 휘장(계급·소속 등을 나타내는 배지)을 수여받음



담비와 손 / Leonardo의 손 스케치


비록 상징이지만 이렇게 함께 있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도 놀라운데, 여성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근육을 세우며 움직이려는 담비를 저지하는 듯한 Cecilia의 모습 또한 놀랍다.

공작을 상징하는 담비를 눌러 통제하는 손동작에서, 당시 Leonardo가 심취해 있던 인체 해부학적인 분석과 관계 속에서 우위를 드러내는 여인의 심리적 메시지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궁정에서 그녀의 위치를 나타내기도 한다. Cecilia는 Ludovico가 공식적인 정부로 삼은 첫 여인으로 궁정의 대소사에 참여하고 관여하는 위치에 있었다.


어리고 예쁜 Cecilia에게 푹 빠져 있던 Ludovico에 대한 소문은 약혼녀 집안의 귀에까지 들어가, 손녀 뻘인 약혼녀가 결혼도 하기 전 걱정에 휩싸이게 만들 정도였다. 당시 페라라* 대사로 밀라노에 살면서 궁정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기록하던 Trotti가, 자신의 군주인 페라라 공작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걱정이 될 만도 하다..



Cecilia는 꽃처럼 아름다워.. [...]
Ludovico의 병은 어딜 가나 그와 함께인,
매우 아름다운 정부와의 과도한 잠자리로 인해 발생한 것입니다.



*페라라 공국 - Ludovico의 약혼녀 Beatrice d'este의 나라


아마도 Ludovico 본인, 또는 자신과 공작의 관계를 은근히 알리기 위한 Cecilia의 요청에 의해 그려졌을 -공작을 상징하는- 이 담비는 초상화의 처음 버전엔 없었고, 두 번째엔 회색의 작은 족제비로 그려졌으나, 최종적으로 자연적인 크기보다 몸집이 더 크고 과장된 근육질의 담비로 변형되었다.

이렇게 새로 태어난 -팔근육이 돋보이는 담비의 용맹하고 건장한 모습에서, 우리는 화가 Leonardo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도 당시엔 권력자들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는 보통의 화가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담비는 또한, 임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1491년 둘 사이에서는 아들 Cesare가 탄생했다. 초상화가 그려질 시기는 1488~90로 추정되기 때문에, 초상화가 그려지는 동안 실제로 그녀는 임신하고 있었을 확률이 높고, 이 경우 Leonardo는 Cecilia의 임신을 상징하기 위해 그녀를 보호하려는 듯한 모습의 담비로 표현했을 수 있다.



그녀는 똑똑했고 어린 나이임에도 우아했다


둘의 만남은 Cecilia의 언니와 관계를 맺고 있던 Ludovio의 개인비서가 주선했을 가능성이 높다.

매우 아름다웠던 Cecilia는 대화가 잘 통하는 소녀였다. 그저 예쁘기만 한 여느 궁정 여인들과는 달리 총명했던 그녀는 생각이 트여있는 부모님 덕분에 형제들과 같은 교육을 받아 지적이었으며, 라틴어를 정확하게 구사했고, 류트를 연주하는 시인이자 가수였다. Ludovico는 딸 뻘이지만.. 그런 그녀에게 매료되었다.


지식인들을 모아 철학에 대해 토론하고 그 토론회에 다빈치를 초대하기도 했던 그녀의 나이는 겨우 10대*였다. 항상 지적 호기심에 굶주려있던 Leonardo에게 똑똑하고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했던 Cecilia는 꽤나 말이 잘 통하는 친구로 다가왔다. 그녀가 주관하는 토론회는 -이유가 실력인지 실세인지 확인하긴 어렵지만- 귀족과 영주가 참석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기도 하는 등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초상화 속 나이는 15~17세, Ludovico와는 21살 차이



우아한 스타일의 그녀

궁정 여인이었던 신분에 비하면 꽤나 수수한 차림새인 그녀는 사실 밀라노 공국의 최신 패션으로 스타일링한 세련된 차림새다. 이는 모두 스페인 스타일 당시 밀라노 공국 패션의 중심은 스페인이었다. 스페인 패션은 그 자체로 특권의 표시였다. 예나 지금이나 역시 사람들은 쉽게 가질 수 없고 값비싼 다른 나라 스타일을 선호하는 듯하다.


정보 교류의 방법은 인편이 전부였던 시기, 국외의 패션이 퍼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결혼이었다. 외국과의 국혼은 외교·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이벤트였지만, 두 나라 간의 패션 교류와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엔 나폴리 왕국*의 공주가 있었다. 원래 밀라노 공작인 Gian Galeazzo Maria Sforza**와 결혼해 막 밀라노로 건너온 나폴리 공주 Isabella d'Aragona와의 친분 덕분에 Cecilia는 스페인의 최신 패션을 가장 먼저 입는 혜택을 누리게 된다.



Isabella가 Cecilia에게 스페인 스타일로
옷을 입히고 손바닥에 쥐고 있다..



라며 밀라노 주재 페라라 대사 Trotti는 군주에게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그녀의 복장은 화려한 장신구도 없이 비교적 절제되고 단순하여 귀족 여성이 아님을 나타내 주기도 한다. 르네상스 시대엔 사회적 지위에 따른 복장에 크게 집착하여 의복에 대한 계급 간의 차이가 명백했다.


* 당시 스페인 점령기를 보내던 나폴리 궁정은 스페인 문화와 패션이 성행

**Ludovico의 어린 조카이자 밀라노 공작



겉옷 형식의 Sbernia


패션 리더답게 Cecilia는 한쪽 어깨에만 겉옷을 걸치고 있는 모습이다. 이 것이 바로 최신 스페인 스타일 ‘Sbernia’.

소매 부분에 아몬드 모양으로 절개가 나 있는 것이 특징인 겉옷이다. 절개가 있는 부분으로 팔을 꺼내 속에 입은 드레스의 화려한 소매 부분을 자랑할 수 있었다.

물자가 풍부해지고 돈이 많아지자 두어 벌로 해결되던 옷은 세분화되고 다양해졌다. 사람들에게 집에서 입는 옷과 외출복을 구분해 입는 개념이 생겼고, 여러 의복을 동시에 겹쳐 입기 시작했다.


겉옷의 종류는 다양해졌으며 강렬한 색상으로 염색한 의상도 많이 나왔다. 색상은 곧 부의 상징이었다. 상류층일수록 복잡한 무늬와, 밝고 강렬한 색상으로 염색된 직물을 선호했다. 이는 경제의 발전으로 이어지는데, 복잡한 염색 기술의 발전에는 하수 시스템의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국가의 성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귀족은 아니지만 Cecilia는 공작(실질적인)의 공식 정부이기에 청록-노랑-빨강 세 가지의 강렬한 색상의 조합이 돋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있다. Cecila의 Sbernia는 안감마저 샛노란색의 실크 새틴으로 마감되었음을 볼 수 있다.



소매와 몸통을 리본으로 엮어 입는 기본 드레스 Gamurra


안에 입은 기본 드레스 Gamurra의 소매는 드레스의 몸통과 엮어진 리본을 풀어서 교체가 가능했고, 리본 사이사이 벌어진 틈으로 속에 입은 속옷 개념의 Camicia(슈미즈)를 풍성하게 끄집어내는 게 유행했다. 가장 힘 있는 남자의 정부임에도 단순한 장신구 -'충실한 사랑'을 상징하는 검은색 석류석 목걸이- 에 이어, Cecilia의 소매는 팔꿈치 사이로 보이는 흰색 Camicia의 풍성함과 주름이 거의 없는데, Leonardo는 이러한 장치들로 Cecilia의 겸손됨을 표현했다.



자수 밴드 Vincji


Gamurra의 네크라인과 소매의 가장자리 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넓은 자수 밴드는 'Groppi' 혹은 'Vincji'라 불리며, Leonardo의 그림 속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 모티브다. 밀라노에 살면서 직물 디자인도 했던 Leonardo의 작품으로 'Vincji'라는 명칭 또한 그의 이름으로 인해 생겨난 것으로 짐작된다.

 

Leonardo와 친분을 쌓은 Cecilia는 어느 날 그에게 부탁을 하게 된다.

1488년 Napoli 왕으로부터 Ermellino기사단의 휘장을 받아 돌아오는 Ludovico를 위해 열릴 큰 축하파티에서, 어차피 공식적으로는 공작 옆에 서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던 Cecilia는 차라리 그 파티에서 가장 아름다워지는 방법을 택했다.

하여 친구인 Leonardo에게 돋보이는 드레스를 만들 원단 선택을 도와달라 요청했고, 그는 성심을 다해 도왔다. Leonardo는 완벽한 드레스를 만들기 위해 고심하여 원단을 고르는 Cecilia의 모습을 보며, 그녀가 얼마나 Ludovico를 사랑하고 있는지 깨달았다고 한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다.


Ludovico는 파티가 끝난 후 Leonardo에게 그녀의 초상화를 의뢰한다. 사랑에 빠진 여인으로서 가장 기뻤을 시기에 그려진 이 초상화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별 선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부자연스러운 머리 모양은 잘못된 복원의 결과물


그림은 오랜 세월을 견뎌오기도 했지만, 전쟁 중에는 나치 손에 들어가 지하에 갇히고 구둣발에 차여 뒤꿈치 자국이 생겼을 정도로 홀대받아 보존상태가 좋지는 못했다.



당시 유행했던 턱 밑으로 머리카락을 묶거나 끈으로 고정했던 스타일


줄리엣 머리로도 유명한 'Coazzone'스페인 스타일로, 밀라노 궁정에서 인기를 끌면서 그 모양은 조금 변형되어 새로운 패션의 수용과 현지에 적응하는 능력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머리 모양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초상화는 복원 시 잘못된 점이 크게 두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 머리 모양이다. 그림의 보존 상태도 좋지는 못했지만, 복원가의 이 시대 머리장식에 대한 이해도도 부족했던 듯하다.

가장자리가 금실로 장식된 투명한 베일은 이마 부분을 제외하고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고, 복원가의 투박한 붓터치로 덧칠해진 머리카락은 어색하게 턱을 감싸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14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사이, 밀라노 궁정에서 턱 밑으로 몇 가닥 머리카락을 묶는 스타일이 유행하기는 했으나 그 모양은 조금 다르다. 밀라노 여인들은 스페인에서 온 머리스타일에, 귀밑머리 몇 가닥을 모아 턱밑으로 보내 얼굴을 감싸는 모양으로 창의성을 발휘해 조금 독특한 스타일로 즐겼다.


조사 결과 원본에서의 실제 머리는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뺨에서 목 밑으로 자연스럽게 흐르는 형태였으며, 머리를 감싼 베일은 자연스럽게 내려와 코 높이 부분에서 뒷덜미 쪽으로 향했고, 자세히 보면 살짝 그 흔적이 남아있다.


 

글귀 LA BELE FERONIERE LEONARD D'AWINCI와 이마 끈


머리를 감싸고 있는 투명 베일은 검은색의 이마 끈으로 고정되어 있는데, 이 이마 끈으로 인해 복원가의 두 번째 잘못이 야기된다. 초상화 왼쪽 상단에는 글귀가 쓰여 있는데, 이 것은 Leonardo가 쓴 것이 아닌 수세기 후 폴란드에서 추가된 것으로 추정된다.



LA BELE FERONIERE
LEONARD D'AWINCI



초상화가 폴란드 왕자에 의해 폴란드로 넘어간 뒤 추가된 이 글귀는, 다빈치가 몇 년 후에 그린 [La bella ferronnière]로 명명된 초상화 속의 여성과 같은 여인인 줄 착각한 복원가가 그림 왼쪽 상단에 ‘La bella ferronnière Leonard d’awinci’*라 적어 넣은 것으로 추측한다.      

거장 Leonardo da Vinci의 그림을 폴란드가 소장했다는 것에 감복한 나머지 이렇게 글씨를 새겨서라도 확실하게 해두고 싶었던 걸까?.. 이밖에도 복원가는 배경 또한 검은색으로 칠해버렸는데, 원래는 회색빛이 도는 파란색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드레스의 몸통과 소매를 이어주는 투박하고 진한 검은색 리본도 복원가의 리터칭이 들어간 부분이다.


*Leonard d’awinci는 폴란드어 표기



흔들리는 위상


명실상부 공작(실질적인)의 사랑받는 공식 정부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던 Cecilia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그냥 여인도 아닌 부인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리다 못해 손녀 뻘인 어린 부인에게 푹 빠진 Ludovico에게 자신의 아이를 가져 몸집이 커진 정부는 그저 정리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이에 대해 밀라노 주재 페라라 대사 Trotti는 자신의 군주에게 이런 보고를 했다.



그녀가 그 만큼 커졌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그녀를 만지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녀가 출산한 후로는 다시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이제 막 결혼한 어린 신부 Beatrice d'Este가 합방을 거부하며 정부들을 정리할 것을 요구하자 급해진 Ludovico는 Cecilia를 궁에서 내보낼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다. 자신의 아들을 막 낳은 정부의 남편감을 물색하기 시작했고, 결국 Cecilia는 이듬해 갓 태어난 아들 Cesare와 함께 결혼 선물이 된 자신의 초상화를 들고 Ludovico의 궁정에서 나오게 된다. 그녀의 나이 겨우 20살이었다.


사랑했던 공작과 Ludovico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Bergamini백작과 결혼하게 된 Cecilia는, 공작이 새로 태어난 자신의 아들 Cesare에게 하사한 Carmagnola 궁전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틀었다.

Cecilia는 궁정에서 했던 것처럼 문학 살롱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사회·문화적 영향력은 이미 인정받았기에, 그녀의 살롱은 Leonardo를 포함한 예술가, 시인, 작가들이 자주 찾아와 의류, 경제, 예술에 대해 토론하고 보드 게임도 하는 만남의 장소로 명성을 떨친다. 당시 궁정과 부유한 사회계층이 가장 좋아하던 오락은 보드게임이나 타로카드로, 고결한 엘리트를 자처하는 이들답게 응접실에 둘러앉아 교양 있는 대화를 나누면서 하는 게임을 즐겼다.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한 문학 및 대화 서클의 초기 버전이 된 Cecilia의 살롱은 유럽 최초의 문학 및 대화 살롱 중 하나로 꼽히며, 이후 프랑스와 다른 유럽 지역으로 퍼지며 살롱문화 대유행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Cecilia 초상화는 그 아름다움과, 사진기로 순간포착을 한 듯한 생동감이 느껴지는 혁신적인 구도로 미술계를 들썩이게 했다. 전통적인 여성 초상화의 틀을 깬 [Ginevra de' Benci]의 초상화를 그리고 난 후 10여 년이나 흐른 뒤 그려졌지만, Cecilia의 초상화는 여전히 당시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전통적인 초상화의 틀에서 벗어난 Leonardo만의 새롭고 혁신적인 구도의 초상화였다.

소문은 널리 퍼졌다. Matova공국에 사는 공작부인 Isabella d'Este*는 초상화를 직접 보고 싶은 마음에 Cecilia에게 서신을 보내 요청했고, 이에 Cecilia는 흔쾌히 초상화를 보내주었다. 이 둘 사이에 주고받은 서신과 몇 가지 남아있는 자료로 인해 전문가들은 초상화의 주인공이 Cecilia인 것으로 추정한다.

그림은 고된 세월을 버티며 몇몇의 나라를 거쳐 폴란드에 정착해, 폴란드의 가장 위대한 예술 보물이 되어 현재 Cracovia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Isabella d'Este는 Ludovico의 부인 Beatrice d'Este의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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