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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 Sep 14. 2023

전적인 나

전업주부라는 제 일을 잘 수행하기 위해 저 자신도 잘 돌봐야 합니다. 일은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저는 제 삶의 근간이니까요. 한 가정의 울타리를 엮은 만큼, 이 터전을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도 마땅해졌습니다. 저는 이제 남편과 아이의 토대이기도 한 셈이죠. 산들바람이야 언제든 마주할 준비가 돼 있지만, 예고 없이 들이닥친 토네이도에도 다시 설 수 있는 뿌리를 다지고 또 다져두어야 합니다.     


몇 해 전 일곱 달이나 품은 둘째를 조산으로 잃고 갈피를 잃은 적이 있습니다. 주변을 의식해 태연한 척 그 해를 넘겼었지요. 첫 번째로는 아들, 두 번째는 남편, 나이 든 부모까지 혹여 병이 들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칠십 중반의 아버지가 대상포진에 걸려 훌쩍 야위신 것도 타격이 컸습니다. 불효를 저지른 기분이었죠. 결코, 네 탓이 아니라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지만, 엄마였던 저는 여전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마음의 병도 부작용이란 게 있는지, 다음 해 파도 같은 슬픔이 부지기수로 찾아오더군요. 구조요청을 하고 싶었지만, 목이 멨습니다. 이제야 왜, 죄인은 너인데,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매서운 심문이 저 자신을 옥죄였지요. 결국, 돌고 돌아 발길이 닿은 심리상담센터에서 한참을 목놓아 울었습니다. 체한 마음을 토해내기 수차례, 거짓말처럼 일렁이던 마음이 잔잔해지기 시작하더군요. 큰 탈 나지 말라고 서둘러 이곳으로 길목을 놓아준 건 먼저 떠난 제 딸이었을까요.     


상담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예기치 못한 건강 문제 때문이었지만, 오히려 이 난관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고요해져 가는 물결 위로 날아든 돌이 크게 아프진 않았다고 해야 할까요. 먼 과거를 빈번히 오갔던 것 같습니다. 기억이 허락하는 한 제 머릿속 데이터를 샅샅이 들춰내는 게 자연스러운 치료의 과정이었죠. 선생님 말씀처럼 ‘나’라는 새싹에 다시금 이로운 물을 주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뿌리내릴지는 이제 저에게 달려있으니까요. 멋들어진 나무들을 올려다보며 저도 그사이에 당당히 자리할 날을 그려봅니다. 과연 어떤 자태를 내뿜는 나무가 될까요.     


학창 시절부터 고리타분하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았기 때문이겠죠. 대부분 구태여 파고들지 않는 것들이 궁금했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왜’ 살아가느냐 하는 등등의 것들이었죠. 그런데 참 모순적이더군요. 그토록 나에 대해 파고들어 왔는데, 정작 나 자신을 사랑한 적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늘 남들의 평가 속에 있었던 것처럼, 저 역시 저 자신을 점수 내리기 급급했더군요. 파고든 결과가 한낱 숫자뿐이었다니, 처음으로 자신에 대한 연민이 일었습니다.   

  

뼈아픈 상실을 겪고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토록 내리기 어려웠던 사랑에 대한 정의인데요. 연민의 감정이 피어오를 때 비로소 사랑이 깊어진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날, 당신이 참 가엾다는 남편의 말이 어찌나 사무치던지요. 가여운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얼마나 서글프던지요. 남편도 아버지도 엄마도, 일순간 모두가 가여워 보였습니다. 마음이 아리더군요. 구태여 묻고 따질 이유가 사라지니 육신마저 가벼워졌습니다. 아마도 한결 산뜻한 마음으로 저와 당신을 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또한 아름드리나무로 뻗어 나가기 위한 과정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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