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간의 회사 생활이 남긴 흔적
프롤로그
15년 가까이 고스트라이터로 생존할 수 있었던 비법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나는 어떻게 고스트라이터가 되었는가'를 먼저 얘기해 볼까 합니다.
1996년 12월, 대학도 졸업하기 전 취업했던 제 첫 직장은 디자인편집회사였습니다. 기업의 홍보물을 편집·디자인하는 회사였는데, 제가 맡은 일은 모 항공사의 기내지(비행기 내 좌석 포켓에 비치되는 잡지)를 편집하는 일이었어요. 해당 항공사가 취항하는 곳을 직접 취재하고, 각 분야의 명사를 인터뷰하고, 비행기 탑승객을 위한 기내 정보를 정리하는 일을 담당했죠. 기내지뿐 아니라 당시 트렌드였던 각 기업들의 사외보(고객 대상의 잡지 형태 기업 홍보물)를 작업하기도 했고요. 그렇게 꼬박 5년을 이곳에서 일했습니다.
(여길 다니면서 결혼도 하고 첫 아이도 낳았던 터라, 그만둔 후에도 여전히 애정을 갖고 있어요.)
다음 직장도 비슷한 곳이었어요. 사보(각 기업의 사내 소식지), 사외보 등을 기획·편집하는 일을 했고, 출판하는 책의 보도자료를 작성하기도 했죠. 첫 직장과 달랐던 점은, 기업의 입찰(경쟁 비딩)에 참여해 제안서를 쓰고 프레젠테이션을 해서 실제로 일을 수주하기도 했다는 거예요. 첫 번째 직장에서의 주된 업무가 취재·편집이었다면 두 번째 직장에선 기획·분석이었던 셈이죠. 1년 3개월밖에 버티지 못할 만큼 힘든 나날이었지만 업무 능력만큼은 확실히 업그레이드됐다는 걸 체감한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마지막 직장을 그만둔 후 프리랜서 생활을 7년 정도 하다가 다시 재입사한 곳이기도 해요. 그때도 역시 1년 6개월 만에 그만뒀지만, 이곳 대표님들과는 여전히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세 번째 직장은 각 기업에서 발간하는 VIP 매거진을 만드는 곳이었어요. 저는 모 자동차 기업과 모 은행에서 발간하는 격월간 VIP 매거진을 번갈아가며 작업했는데, 팀장으로 영입이 된 터라 업무 부담이 상당했습니다. 1명의 팀원과 함께 매달 100p에 달하는 잡지 한 권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덕분에 1년 6개월 정도밖에 버티질 못했죠. 하지만 기존과 다른 잡지사의 업무 프로세스를 경험할 수 있었고, 좋은 선후배를 많이 만나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곳은 직장 환경이 불안정해지면서 그만뒀어요. 급여가 50%만 나오는 상황이 2달 정도 지속돼서요. 마침 둘째를 임신하기도 했던 터라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습니다.)
마지막 직장은 잡지사였어요. 모 백화점의 VIP 매거진을 만드는 부서에 피처 기자로 입사했죠. 세 번째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동갑내기 기자가 팀장으로 있던 곳이라, 저한테는 말 그대로 새로운 도전이었어요. 둘째를 낳고 난 다음이라 일이 절실하기도 했고요. 이곳에서도 1년 6개월을 일했습니다. 전 직장에서 경험해 보긴 했지만 잡지사의 고유한 프로세스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고, 인간관계도 힘들었어요. 진짜 내 삶은 중산층 이하인데, 내 일은 상위 1%를 타깃으로 한다는 점에서 오는 괴리감도 컸고요.
제 10여 년간의 직장생활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클라이언트 잡'에 종사해 왔다는 거예요. 기내지, 사보, 사외보, VIP 매거진 등 그 형태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일을 의뢰한 클라이언트가 있었다는 거죠. 제 이름을 내건 기명 기사도 숱하게 썼지만, 고스트라이터가 되어 썼던 애드버토리얼 기사나 정보성 기사가 셀 수 없이 많았던 이유입니다.
아이러니한 건 이때 훈련했던 것들이 기반이 되어 프리랜서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출퇴근을 하지 않고,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살림도 하고 일도 하는 생활이 시작된 거죠. 그리고 그중 일하는 시간 대부분은 기업 홍보물을 작업하는 일에 투자했습니다. 각 기업의 애뉴얼리포트, 홍보 브로슈어, 지속가능보고서, 환경보고서 등에 들어가는 원고를 쓰고, CEO의 회고록이나 화보집, 사보나 사외보를 기획·편집하는 일을 한 거죠. 각 기관의 사례집, 사사 등의 원고 작업도 하고요(대개 이런 작업물엔 글쓴이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사사의 경우엔 글쓴이가 누구인지 명시가 되지만요).
가끔 이런저런 매거진에 기명 기사를 기고하는 일도 했지만, 이보다는 기업 홍보물 하나를 맡아 작업하는 게 수익 면에서 훨씬 도움이 됐습니다. 고스트라이터면 어떤가요? 생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명예보다 돈을 우선시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그렇게 15년 여를 꾸준히 일하다 보니 그럭저럭 이쪽 업계에서 발붙이고 살아갈 만한 경력을 쌓게 됐습니다. 나름 일 잘한다는 소리도 듣고, 페이도 적지 않게 받게 됐고요.
물론 고스트라이터로 살게 된 게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직업이든 그 분야에서 오래 일해온 사람에겐 나름의 업무 노하우가 있는 법. 저도 지금부터 저만의 생존 비법을 정리해 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