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시간보다 서핑 시간이 더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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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유한합니다. 특히 마감 시간은 더더욱이요. 하지만 저는 절대 일을 미리미리 하지 않습니다. '머리는 초반부터 가동하되 손은 가장 마지막에!'가 제 작업 모토거든요. 1주일 만에 마감해야 하는 일이라면, 작업은 대개 마감 하루 전날 시작하는 식이죠. 촉박한 시간은 작업 효율을 높여주고, 집중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작업 퀄리티를 향상해주기 때문입니다.
최근 들어 심해진 증상인데, 저는 원고 쓰는 시간보다 워밍업 시간이 더 긴 편입니다. 노트북을 켜기까지, 또 본격적인 작업 모드로 들어가기까지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린달까요? 한 마디로 노는 모드에서 일 모드로 가기까지의 진입장벽이 꽤나 높은 셈입니다.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을 때도 머릿속은 꽤나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놀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려면, 예상 작업 시간을 정확하게 산출해야 하니까요. 일례로 '4시간 정도 작업하면 끝낼 수 있는 일이다'라는 계산이 서면, 마지노선까지 계속 놉니다.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건데, 저한테는 이 방법이 아주 잘 맞습니다. 워낙 일하다 말고 딴짓하는 걸 좋아하는지라 '마감까지 주어진 시간은 단 4시간뿐!', 이런 식으로 제한을 해두어야 마냥 놀고 싶어 하는 저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거든요.
물론, 일의 성격과 난도에 따라 산출되는 예상 작업 시간은 달라집니다. 사사(社史) 원고 집필이나 단행본 윤문 작업처럼 원고량이 많고 기간이 긴 작업의 경우, 이 방법은 적절치 않아요. 이런 장기 프로젝트들은 매일매일 꾸준히 작업해야 제때 마감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매체에 실릴 취재 원고 작성이나 20p 전후의 짧은 BR 카피라이팅 작업 같은 경우, 이 방법을 즐겨 사용합니다. 원고가 잘 안 풀려 자꾸만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싶을 때도 논스톱으로 일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원고 작업은 은근과 끈기에 기반한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원고는 엉덩이로 쓰는 것'이란 속설도 아마 이런 의미겠지요.
사실, 제가 워밍업 시간을 길게 갖는 건 그저 놀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일 모드로 전환하기 위한 준비 시간인 만큼 실제 원고 작성에 필요한 자료를 검색하는 용도로도 활용하고 있거든요. 참고 자료를 찾아서 읽고, 인터뷰 녹취 파일을 풀고, 클라이언트가 보내준 자료를 검토하는 등의 작업을 이 워밍업 시간에 하는 거죠. 이 시간을 얼마나 짜임새 있게 잘 보내느냐에 따라 작업 퀄리티도 달라집니다. 물론 가끔은 워밍업 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전히 쉴 때도 있고, 작업과 전혀 관계없는 것들을 찾아 읽을 때도 있어요. 하지만 이 시간들도 그리 무용하진 않습니다. 잘 쉬어야 머리가 맑아지고, 우연히 찾아 읽은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야 원고도 더 재미나고 풍성해지니까요.
그러므로 저는 이제 더 이상 '나는 왜 빨리 일 모드에 진입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할까?'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원고를 쓰는 시간뿐 아니라 그 전의 워밍업 시간도 다 필요하고 소중한 시간이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