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얇아서 좋은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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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귀가 얇은 편입니다. 물리적인 면과 은유적인 면 양쪽 다요. 귓불이 얇은 데다, 남의 말에 잘 혹하거든요. 저는 옆에서 누군가 '이건 이런 거야'라고 얘기하면, '아 그렇구나'하고 금세 수긍하는 편이에요. 남의 말을 잘 들어주고, 잘 수긍하고, 잘 받아들이는 거죠. 한 마디로 남의 말에 휩쓸리기 쉬운 타입이라 할 수 있어요. 다행인 건 호불호가 명확하다는 겁니다. 귀는 얇지만 취향이 분명해 아무나에게 휘둘릴 일은 없다는 거죠. 게다가 귀가 얇다는 건 '엄마'라는 직업에도 아주 유용합니다. 아이들과 소통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무기(?)는 없으니까요.
얼마 전에는 아들 학원에서 오디션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아들이 지나가듯 말하긴 했는데, 제가 나서서 챙기진 않는 터라 '그냥 그런 게 있구나' 했었죠. 어차피 힙합음악에 대해선 잘 모르기도 하고요. 그런데 아들은 꽤나 신경 쓰고 기대를 했던 모양이에요. 하필 그날따라 컨디션이 안 좋아서 자기 실력을 100% 발휘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더라고요. 애써 괜찮은 척 하지만 속상함이 묻어나는 말투길래, 저는 아들의 말을 충분히 들어준 후 "최선을 다했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야. 기회는 또 있을 텐데, 뭘"이라는 반응을 돌려주었습니다.
물론 한 번에 오디션에 통과할 만큼 재능이 탁월하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겠지요. 하지만 그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가 얼마나 될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아이의 재능을 제대로 꽃피우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실패와 좌절은 경험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아프고 힘들고 괴롭겠지만, 어떻게 하면 실패와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을지, 고민하고 성찰하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니까요. 다행히 아들은 아쉬움을 툭툭 털어버리고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간 듯합니다.
딸의 이야기도 좀 해보겠습니다. 딸은 모 포털사이트 계열사에 근무 중인데, 아마도 서비스 상담 업무를 하는 듯해요. 사실 딸의 성향-집에 있는 걸 좋아하고 사람 만나는 걸 꺼리는 히키코모리 성향과 뭔가에 한 번 빠지면 깊이 파고드는 덕후 성향을 동시에 갖고 있답니다-과는 잘 맞지 않는 일인데, 직장이 집에서 차로 5~10분, 버스로 15분 정도 거리라 가깝고, 9 to 6가 잘 지켜지는 곳이라 선택한 것 같아요. 하지만 막상 다녀보니 생각보다 더 힘든 모양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회사 가기 싫다'는 얘길 반복해요.ㅠ.ㅠ
문제는 이런 얘길 들을 때마다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너무 힘들면 그만두는 것도 방법이야'라고 해야 할지, '직장은 원래 다 힘들단다. 조금만 버텨보렴'이라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더군요. 심한 내적 갈등 끝에 제가 선택한 건 침묵이었어요. 근데 아실지 모르지만, 누군가로부터 어떤 말을 듣기만 하고 침묵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에요. 특히 부모 자식처럼 친밀한 관계에선요. 어렵고 힘든 일이 있다면 어떻게든 해결해주고 싶은 게 부모 맘이거든요.
며칠 전에는 회사 앞에 도착했는데도 내리기 싫어하는 듯해 "아직 시간 있으니 한 바퀴 더 돌까?"라고 먼저 말을 꺼내 보았습니다. 딸은 "그래도 돼?"라며 반색하더군요. 한 바퀴 더 도는 데 걸리는 시간 10분. 그 짧은 시간 동안 딸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평안할 수 있다면 한 바퀴 더 도는 것쯤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10분 동안 저는 운전에, 딸은 휴식에 빠져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어요. 하지만 우리의 침묵은 따뜻했고 분위기는 온화했습니다. 때론 듣기만 해도, 혹은 침묵만으로도 충분하단 생각이 절로 들만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