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해도 안 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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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저나 시어머니는 활동 범위가 그리 넓지 않다 보니, 자신보다 맛난 걸 먹을 기회가 적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남편은. 그래선지 늘 자기가 먹어보고 괜찮다 싶은 곳에 저희를 데려가곤 합니다. 이번에 갈 곳은 남편 회사 근처의 항아리 수제비집이었어요. 수제비를 얇게 떠서 쫄깃하면서도 맛나다고 몇 번이나 얘길 했었거든요. 저와 시어머니는 드라이브 겸 나들이 가는 기분으로 즐겁게 따라나섰답니다.
막히는 길을 뚫고 1시간여 만에 도착한 남편 회사. 그러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슬픈 현실이었습니다. 지하 1층에 있다는 항아리 수제비집에 가보니, 오늘은 사장님 결혼식이라 휴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거든요. 이런이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필 사장님이 오늘 결혼하실 건 뭔지... 기대했던 수제비를 못 먹게 돼 아쉬웠지만 남편도 몹시 당황한 것 같길래, "오늘은 수제비 먹을 날이 아닌가 보네. 우리 다른 거 먹자. 뭘 먹을까?"라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남편은 "육개장, 쌀국수, 초밥 중에서 골라 봐"라고 하더군요. 어머니와 저는 초밥을 선택했어요. 몇 번 갔던 곳인데 맛이 제법 훌륭했거든요. 그래서 얼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초밥집이 위치한 1층으로 올라갔죠. 그런데 이런, 여긴 개인 사정으로 당분간 토요일, 일요일엔 문을 안 연다네요.ㅠ.ㅠ '아, 오늘 왜 이러지?' 소리가 절로 나왔어요. 하지만 뭐, 별 수 있나요? 나머지 중 선택할 수밖에요. 그래서 제가 "오늘은 초밥 먹을 운이 아닌가 보네. 그냥 쌀국수 먹자"라고 했죠. 그래서 다시 지하 1층으로 내려왔는데, 쌀국숫집도 문을 열지 않았더라고요. 결국 셋 다 탄식을 내뱉으며 "오늘 진짜 이상하네. 가는 곳마다 왜 이러지?"를 연발했답니다.
세 번이나 메뉴 선택에 실패한 저희는 "그냥 집에 가는 길에 있는 해장국집에서 내장탕이나 먹자"라는 남편의 말에, "그래"라고 답하곤 주차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머니가 "예전에 갔던 옹심이메밀칼국수집에 가서 감자채전이랑 메밀칼국수 먹으면 어때?"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집 감자채전이 유독 맛났던 게 생각난 저는 열렬히 환호하며 찬성 의견을 냈죠. 남편도 "그래, 그러자"라는 말과 함께 롯데백화점 관악점 인근에 위치한 '봉평 옹심이메밀칼국수'로 차를 돌렸습니다. 다행히 여긴 영업 중이었어요.^^ 웨이팅 없이 자리도 잡을 수 있었고요. 저는 네 번만에 드디어 밥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에 신이 나서 "물막국수 하나, 칼국수 하나, 옹심이칼국수 하나, 감자채전 하나요"라고 주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직원분이 "계절 메뉴 할 때는 감자채전을 안 해요"라고 하시는 거예요. "아, 감자채전 먹으러 왔는데, 감자채전 안 해요?"라는 실망 섞인 탄식이 절로 나오더군요. 결국 감자채전 먹으러 갔다가 감자채전은 못 먹고 물막국수와 메밀칼국수, 옹심이메밀칼국수만 먹고 돌아왔습니다.
그 와중에 물막국수는 맛났어요. 하하. 동치미국물 베이스에 고기 육수를 섞은 듯한, 살얼음이 동동 뜬 국물도 맛났고, 칼국수면보다 살짝 얇은 메밀면도 쫄깃했답니다. 위에 얹힌 계란 지단과 잘게 찢은 고기, 메밀싹 고명도 훌륭했고요.
네 번의 도전 끝에 간신히 밥은 먹었지만, 성공한 것도 아니고 성공한 게 아닌 것도 아닌 저희의 주말 점심 투어는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가끔 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다더니 아마 어제가 그런 날이었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