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지만 해볼 만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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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세 번째 토요일. 아침 일찍 마라톤대회에 참가해 10km를 달린 후 오후엔 김장을 했습니다. '과연 두 개의 커다란 이벤트를 하루 안에 다 소화할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했는데, 사람이 마음먹어서 안 되는 일은 없더라고요. 힘들고 고됐지만, 둘 다 무사히 끝마쳤습니다.
알고 보면 김장은 일 년 먹거리를 준비하는 큰 행사입니다. 그러나 저한테 김장은 웬만하면 피해 가고 싶은 일이었어요. 두 엄마(친정엄마와 시어머니)의 등쌀(?)에 못 이겨 마지못해 하는 일이었달까요? 그런데 올해는 얘기가 좀 달라졌습니다. 일단 작년 김장 김치가 너무 맛나서 일찍 동이 났어요. 그래서 '그래, 사 먹는 거보다는 힘들어도 해 먹는 게 맛나지'라는 인식의 변화가 저 자신에게 있었고, 또 올해 시어머니가 몸이 안 좋아지셔서 김장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친정엄마는 저 준다고 김장 배추와 무를 수확해 쟁여두고 있는 상황이었고요. 한 마디로 빼도 박도 못하게 제가 김장을 주도해야 하는, 제 몫의 일이 된 겁니다.
'아무래도 이건 좀 힘들겠는 걸. 딸과 아들에게 SOS를 쳐야겠다'라고 생각한 저는, 이번 김장을 가족 행사로 승격시켰습니다. 그동안은 딸과 아들을 김장에서 제외시켜 줬었거든요. 힘든 일 시키기 싫어서요. 하지만 이번에도 그랬다간 제가 드러눕게 생겼으니 할 수 있나요. 애들 손이라도 빌릴 수밖에요. 그렇게 예년과 다른 김장 프로젝트가 시작됐습니다.
제가 요리를 싫어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재료를 사서 다듬고 씻고 썰고 다지는 전처리 과정이 싫어서예요. 요리를 안 해본 사람들은 '그게 뭐 힘들어?' 하겠지만, 실제 요리를 해보면 요리하는 시간보다 이 전처리 과정에 훨씬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래서 저는 주로 인터넷 쇼핑으로 장 보는 일을 해결해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요. 하지만 명절 상차림과 김장은 재래시장 방문이 필수입니다. 뭐, 인터넷 쇼핑도 김장 준비가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오랜 시간 시어머니와 함께해 온 게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재래시장으로 발길이 가더라고요. 이번 김장 준비도 그랬습니다. 김장 전날, 재래시장에 가서 생강과 쪽파와 갓을 사고, 굴과 생새우도 샀어요. 새우젓, 까나리액젓은 근처 식자재 마트에서 사고, 육수로 넣을 설렁탕은 유명 프랜차이즈 전문점에서 샀습니다. 절임배추와 무, 대파는 친정엄마가 주시기로 해서 제외했고요.
그다음엔 장본 물건들을 하나하나 정리해서 손질을 시작했습니다. 흙이 묻은 생강 껍질을 까서 믹서에 갈고, 쪽파와 갓을 손질해 씻은 후 적당한 크기로 썰고, 찹쌀풀도 끓였어요. 굴과 생새우도 깨끗하게 세척하고요. 이것만 하는데도 반나절이 후딱 지나가더라고요. 장본 시간까지 하면 하루가 순식간에 가버린 거죠. 계속 서서 일하느라 다리도 아프고 기력도 딸리고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나'란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습니다.ㅠ.ㅠ 그래도 그럭저럭 제 선에서 해야 하는 김장 준비는 마무리. 이제 마라톤대회 끝나고 강화 친정집에 가서 엄마가 준비해 둔 절임배추와 무채, 대파만 실어오면 되는 상황이 됐습니다.
다행히 마라톤대회 겸 김장 당일 날씨는 아주 좋았어요. 아침 일찍 상암월드컵공원에 가서 준비하고 있다가 달리기 시작. 10km라 만만한 거리는 아니었지만, 1시간 19분 2초 93의 기록으로 완주에 성공했습니다. 이젠 10km 완주도 그리 어렵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라톤이 끝난 다음에는 집에 와서 씻고 배추와 무를 가지러 강화로 출발했습니다. 주말이라 여행 인파가 많아서인지 길이 밀려서 가는 길, 오는 길 다 쉽지 않았어요. 집에 도착하니 오후 6시가 넘었더라고요. 대충 라면으로 허기만 메운 후 김장을 시작했죠. 시어머니의 관리 감독 하에(본인이 없으면 못 할 거라 생각하셨는지 아픈 다리를 이끌고 김장에 참여하셨어요) 가족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저와 딸은 김치 속을 버무리고, 아들과 남편은 오며 가며 양념 준비해 놓은 걸 옮겨주고 깍두기 할 무를 썰어주는 등 자질구레한 일들을 맡아서 해주었어요. 5명 모두 제 몫을 다해준 덕분에 김장은 1시간여 만에 끝이 났습니다. 손이 여러 개니 속도도 자연히 빨라지더라고요. 김장을 마친 후엔 다 같이 둘러앉아 서로의 고생을 치하하며 수육과 굴 보쌈을 맛나게 먹었습니다. 고된 노동 끝에 먹는 고기와 술은 참 달더라고요.^^
10km 마라톤과 김장을 함께한다는 게 처음엔 엄두가 안 났는데, 잘 끝내고 나니 성취감이 장난 아니네요. 종류가 다른 일이긴 하지만, 고되고 힘든 과정을 견뎌야 한다는 게 닮아서 그런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