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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승광 Feb 23. 2024

가족의 형태는 고정되어 있는가

가족이라는 틀걸이 (5)

민법의 가족 규정을 검토하기에 앞서 가족법의 특징을 잠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민법은 판덱텐 체계라는 독일식 민법 편제를 따르고 있습니다. 독일 민법이 일본 민법으로, 일본 민법이 우리나라 민법으로 계수되어 온 것이죠. 독일 민법의 특징은 인간상을 두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자유로운 인간상과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상입니다(이동수, 2021). 


자유로운 인간상은 신에 복속된 인간이 아닌 그 자체로 존엄하고 자유로운 인간, 근대 사상의 밑바탕이 된 인간상입니다. 자율적으로 관계를 맺고 계약을 체결하며 그에 따라 책임을 지는 인간상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상이며,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인간상입니다. 그리고 민법에서의 물권법이나 채권법과 같은 재산법 관련 규정은 이러한 자유로운 인간상에 따라 규정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약속을 무효 또는 취소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엄격한 요건이 요구됩니다.


그에 반해 가족법에 투영되는 인간상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는, 특정한 결속체에 의탁해야만 생활이 가능한 존재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 혹은 어린 아이를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이에게 완전한 자율성을 인정하고 독립된 선택권을 부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는 스스로의 삶을 책임질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를 보호하는 결속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결속체가 가족인 것입니다. 따라서 가족법의 주요 규정들은 재산법에서와 같이 개인의 권리와 의무릃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의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가족의 구성원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가족법은 가족을 중심으로 문제를 인식하게 됩니다. 친자관계, 후견, 부양 등이 그렇게 규정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어린 아이 시절에야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식되는 것이 옳다 치더라도,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렇게 취급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냐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민법상 가족제도가 고정된 것이냐라는 질문을 전제로 합니다. 후자의 질문부터 풀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헌법재판소가 호주제 헌법불합치 결정을 통해 이미 답을 했거든요. "가족제도는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생성되고 발전된 역사적·사회적 산물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하여 가족제도나 가족법이 헌법의 우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없다."(헌법재판소 2005. 2. 3. 선고 2001헌가9 등 결정)


동굴 속에서 발견된 돌로 된 법전 (Bing 이미지 크리에이터)


그렇다면 헌법 조문을 봅시다. 헌법 제36조 제1항은 가족생활의 보장 규정이라고 불리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현재의 가족 제도가 그르다고 하기에는 성급해 보입니다. 헌법 문언만으로 가족생활에 요구되는 것은 개인의 존엄, 양성의 평등 뿐이니까요. 게다가 가족이 무엇이냐에 대해 헌법은 말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헌법이 보장하려는 가족이 무엇인지 해석론을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연구자들마다 그 견해가 다르지만 가족 구성원이 하나의 생활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공통적입니다. 견해가 갈리는 부분은 구성원 간의 관계가 현행 민법의 가족에서처럼 혈연, 혼인, 입양 등으로 엮여있어야 하느냐입니다. 헌법재판소의 경우 이 부분에 대해 매우 유연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위에서 언급한 2005년 결정에서 "오늘날 가족이란 일반적으로 부모와 미혼자녀로 구성되는 현실의 생활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사회의 분화에 따라 가족의 형태도 매우 다변화되고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와 함께 "자녀가 없는 부부만의 가족, 모와 자녀로 구성되는 가족, 재혼부부와 그들의 전혼소생자녀들로 구성되는 가족들도 많다"고 언급합니다(헌법재판소 2005. 2. 3. 선고 2001헌가9 등 결정). 결국 헌법재판소의 입장은 가족의 요소로 생활공동체만을 필수적으로 남겨두고, 구성원 간의 관계를 비롯한 가족 형태는 사회에 맡겨둔 것이라 보여집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조금만 더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혼인과 가족생활은 인간생활의 가장 본원적이고 사적(私的)인 영역이다. 이러한 영역에서 개인의 존엄을 보장하라는 것은 혼인·가족생활에 있어서 개인이 독립적 인격체로서 존중되어야 하고, 혼인과 가족생활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에 관한 개인과 가족의 자율적 결정권을 존중하라는 의미이다. ... 국가는 개인의 생활양식, 가족형태의 선택의 자유를 널리 존중하고, 인격적·애정적 인간관계에 터잡은 현대 가족관계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헌법재판소 2005. 2. 3. 선고 2001헌가9 등 결정)


여기서 눈길이 머무는 대목은 가족형태에 대한 선택의 자유, 그리고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존중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혈연, 혼인, 입양으로만 가족 형성을 인정하는 제도가 이러한 헌법 이념에 부합하는지에 관해서는 상당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 가지 중 개인의 선택권이 작용할 수 있는 것은 혼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혼인 외의 가족 형성의 자유는 막혀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 참고문헌

이동수. (2021). 현행 법질서에서의 가족법의 위상과 과제. 비교사법28(2), 2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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