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기억한다는 일.
2019년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5주기였습니다. 지난번 이슈와 재난에 관해 글을 썼을 때만큼이나 오늘 역시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아무리 표현을 가리고 가려도 세월호 피해자 분들은 물론 유가족 분들께 실례가 될 뿐이라고 여기기에 자세한 사안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려 합니다. 그래서 두루뭉술하게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를 하되, 세월호 그 자체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째서 기억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
세월호를 두고 여러 반응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뭐라 한 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유가족들은 물론, 그 슬픔에 함께하는 이들까지 한데 묶어 힐난하는 태도를 마주할 때가 있지요. 이쯤 되면 그만 슬퍼할 때도 되었다든지 혹은 다른 재난이 일어났을 때, 세월호 유가족에게 그 자리에 함께 했는지 책임을 묻는다든지. 결국 유별나게 굴지 말라는 이야기일 겁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일이 아닌 일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건 여러 번 보았지만 그럼에도 냉철함을 가장한 그런 비아냥은 보아도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겪지 않았으니, 공감하기 어려운 거야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마는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이유에는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물론 우리에겐 일상이 있고 그렇기에 언제까지고 그 슬픔에 빠져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슬픔에 빠져있는 이들을 두고 왜 빠져나오지 않느냐고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재난이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으니까요. 그 자리는 다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들이 다시금 시작하려고 마음 먹었을 때 돕는 것 뿐이겠죠.
도움이라는 게 꼭 직접적인 형태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저 사안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 정도라도, 소극적인 차원의 도움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슬픔에 함께 해주지 못할 지언정, 언제까지 슬퍼할 거냐고 힐문하지 않는 태도가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무관심한 태도가 낫다고 할 수도 있구요. 어떤 태도가 정답이라고 말하긴 어렵네요. 다만 오늘 첫문단에서 말씀드렸듯 오늘 하루만이라도 함께 할 수는 있겠죠. 행동이 아닐지라도, 그들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2014년, 군대에서 뉴스를 처음 봤던 날이 아직 기억납니다. 저에게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지겹디 지겨운 군복무 중 하루에 불과했지만 누군가에겐 그 이후로 평소라는 단어를 쓸 수 없을 만큼, 일상에서 멀어지고 말았을 겁니다. 그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5년이란 시간이 지닌 무게도 달랐을 겁니다. 저에게 주어진 삶이 있기에 살아가며 순간순간의 기억이나 감정도 무뎌지지만, 오늘 하루라도 그날을 기억하고 함께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