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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May 12. 2019

[하루에 짧은 글 한 편] 2019.5.12

40. 배송


2018년부터 영양제를 이것저것 챙겨 먹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피로 해소에 도움이 될까 싶어 밀크시슬로 시작해서 종합비타민도 먹으면 좋다고 해서 이 두 가지만 먹다가, 알아보니 먹으면 좋은 것들이 왜 이리 많은지. 지금은 하루에 먹고 있는 약의 종류만 8개는 됩니다. 앞서 말한 두 가지에 더해서 프로바이오틱스, 오메가3, 마그네슘-칼슘, 루테인, 커큐민에 타우린 파우더. 얼마나 효과를 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좋다니까 일단 먹고 보는 느낌이 있죠. 방금도 아이허브로 몇 가지 주문을 끝낸 상태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약이냐구요? 아닙니다. 바로 배송입니다. 고작해야 화면을 몇 번 터치했을 뿐인데 결제가 끝나고, 제 통장에선 돈이 빠져나갑니다. 그와 동시에 지구 반대편에선 항공기에 실을 물건을 준비하겠죠. 일련의 과정은 이제 우리의 삶에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지만, 이렇게 정착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죠.


나중엔 더욱 놀라운 기술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사실 지금도 충분히 놀랍습니다.


평소엔 의식하지 못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놀라운 일 아닙니까? 집을 벗어나지 않아도 지금 당장 필요한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데다, 지문을 이용하거나 카드번호를 등록하기만 하면 번거로운 과정을 생략한 결제의 편의성까지 갖춰졌습니다. 주문한 물건을 받으러 나갈 필요도 없죠. 이 모든, 배송의 과정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건, 상상만 해도 경이롭습니다. 또한 국내인지 국제인지에 따라 소요되는 시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국제의 경우는 일주일 이상 소요되긴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온다는 걸 감안하면 이 정도는 충분히 빠르죠. 국내도 빠르면 하루, 아무리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도착합니다. 가끔 이래도 괜찮은 건가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 인간은 너무도 빨리 익숙해진다 싶습니다.


문득 이렇게 편리한 시스템을 떠받들고 있는 건 무엇인지 의문이 듭니다. 사용자의 편의성, 물론 중요하죠. 내가 주문한 상품을 하루 만에 배송해 준다는데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그러나 경각을 다투어 가며 받아야 할 정도로 중요한 물건은 별로 없다는 게 사실이겠죠. 그럼에도 배송업체는 조금이라도 빠르게 배송하고자 하고, 그와 마찬가지로 소비자들도 이러한 빠른 배송을 당연히 여깁니다. 옳다 나쁘다가 아니라, 그 시스템을 떠받들고 있는 건 또다른 사람들일 겁니다. 배송업체의 현실과 노동자의 열악한 처우를 소개하는 뉴스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죠. 그러나 뉴스가 나온다한들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당장 눈앞에 놓인 편리함은 우리가 그들의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게끔 했습니다


그렇다고 배송을 아예 이용하지 말자든지, 불합리한 현행 체계를 갈아엎자든지, 그러한 급진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당장 저만 하더라도 배송을 이용하며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마당에 이 모든 걸 다 포기하자고 말해본들 언어도단에 불과합니다. 입바른 소리야 얼마든지 늘어놓을 수 있겠지만 정작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위선에 불과하구요. 그럼에도 배송 횟수 자체를 예전보다 줄인다거나, 배달기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정도의 노력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하루아침에 시스템을 바꾸기엔 개인의 힘은 미력합니다. 그러나 사소한 노력이 쌓이면 아주 조금씩이라도 바뀌어나가겠죠.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겠구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할 수 있는 게 그리 적지만도 않습니다. 


결국 개개인이 다소간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귀결됩니다. 일상을 바꾸는 건 물론 정치적 영역으로까지 행동을 이어가려면 보통 귀찮은 게 아니죠. 그냥 배송을 이용하고 지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굳이 덜 이용하고, 시스템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없구요. 오히려 그로 인해 삶이 번거로워지기만 하겠죠. 저도 무엇이 맞다고 말하진 못하겠습니다. 비겁하게도 이런 사안에 대해 말할 때 항상 머뭇거리게 됩니다. 다만 우리를 둘러싼 이 집단, 사회, 세계가 무엇을 딛고 서있는지 생각해보자는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섯 문단 안에 이야기하기엔 어려운 주제였나 봅니다. 설령 한 편의 글이었다 해도 어려운 건 매한가지였겠지만요. 그저, 이 물음을 꾸준히 이어나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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