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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템포 Mar 24. 2021

아홉 번째 감사일기

느리게 찬찬히 감사하기

 바쁜 일상을 살아내느라 소상히 감사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제는 습관이 되었는지 일기를 따로 쓰지 않아도 문득 감사할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한다. 감사의 순간은 특별한 계기가 아니라 대부분 일상에 녹아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행복과 감사한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찾아내고 발견하고 느끼는 것에서 온다. 요즘의 감사했던 일들. 




좋은 책을 알게 된 것과, 이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음에 

또 글을 읽고 쓰며 문장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내가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좋은 책의 문장들을 필사하는 것이다. 

올해 초부터 독서기록을 시작했다. 꾸준히 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부담을 덜어내는 것이다. 가끔 형식이 바뀌기도 하고, 삐뚤빼뚤한 선을 긋기도 하고, 오탈자가 나기도 하며, 내 생각 없이 문장을 그저 적기만 하기도 한다. 


 꾹꾹 눌러쓴 글씨처럼 내 마음에 새기고 싶은 문장들이 많다. 그냥 읽었다면 곧 잊어버리고 말 문장들이었지만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고, 내가 생각하는 바를 정리한 문장들을 쉽게 흐려지지 않는다. 더 좋은 사실은 독서모임을 통해 친구들과 이를 나눌 수 있다는 것. 내 생각을 전하고 다른 이들의 관점을 듣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고유의 말과 글이 있다는 것도 참 감사한 일이다. 몇 백 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이런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을 수도 있고, 또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한글만이 주는 깊은 울림을 즐기지도 못했을 테니까. 



일할 수 있는 곳이 있음에, 

또 나의 일을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합니다. 

 풀리지 않는 문제들, 사소한 실수의 반복, 조직구조의 변화 등으로 직장생활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에 적색 등이 켜지고 있는 참이다. 불평을 입 밖으로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데도, 유난히 편한 이들에게 일하고 싶지 않음을 자주 말했다. 


 내가 힘없이 때로는 분노에 차서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엄마는 '일할 곳이 있다는 그 자체가 행복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야속함에 입이 댓 발로 나와 '그럼 엄마가 나 대신 출근해!'하고 쏘아붙였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의 밥그릇 하나를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것, 그리고 해야 할 일이 주어진 것이 당연한 일은 아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면접에서 이 회사가 아니면 안 될 것처럼, 다시는 없을 것처럼 간절했던 취준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물론 그렇다고 제가 공짜로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득 오피스에 도착하여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것, 나의 일이 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불행했던 취업준비 시절과 비교하여 행복을 찾고 싶지는 않기에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은 계속 고민 중이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2년이 되는 날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케이크를 준비해주셔서 동기들과 촛불도 끄고 시어머니라며 우스갯소리를 하는 분들에게 선물도 받았다. 나도 모르는 2년을 챙겨주신 마음에 감사하고, 어찌 되었든 2년간의 시간을 잘 보낸 스스로에게도 감사하다. 


엄마와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엄마와 단둘이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다. 

얼마 전에는 미나리를 보고 돌아와 나의 꼬드김에 넘어가 둘이서 샴페인을 땄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어서 신이 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엄마와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다정함을 후천적으로 장착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건 still ing)인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시니컬할 때가 있다. 특히 일이나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아 체력이 방전되었을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고 사랑해주는 우리 엄마. 


 빨래부터 밥까지 모든 것을 혼자 하며 사는 것이 익숙해졌는데, 요즘은 엄마가 있어 집에 온기가 도는 느낌이다. 홀로 있는 것을 좋아하고 외로움보다는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오는 길의 따스함이 다르다. 밥 짓는 냄새와 깨끗한 집, 그리고 엄마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좋다.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하루하루와 엄마의 딸로 태어난 것에 감사하다.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여유와

꽃이 피어나는 봄 날씨에 감사합니다.


주말이면 공방을 간다. 얼마 전에는 첫 작품으로 스툴을 완성했다. 

코로나며 이런저런 일정들로 예정보다 미뤄지기는 했지만, 서두를 것이 없는 일이기에 조바심은 나지 않는다. 나무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진다. 


 목재를 다듬는 일은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도마 하나를 만들 때에도 수많은 정성과 품이 들어간다. 

샌딩으로 곡선을 만들어낼 때면 무아지경에 빠질 때가 있다. 

기계를 쥔 팔이 부들거리고 목이 뻐근하고 눈에 분진이 들어가기도 하지만, 곡선을 만들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아무 생각 없이 내가 만족할 때까지 반복, 그리고 또 반복한다. 

한 끗 차이로 선의 느낌이 달라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유려한 곡선을 만들고 싶어 내는 욕심. 


 나무와 꽃, 살아있는 것들을 보면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짠하고 나타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비와 바람, 따뜻한 볕, 그리고 내 손에 오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함께한 생명체. 


효용의 가치로 모든 것을 따지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깨닫는다. 

즐거운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는 일요일 오전에 감사하고, 또 예쁜 꽃들을 실컷 볼 수 있는 봄이 오고 있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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