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도시, 락 03화

밥맛없을 땐 아삭아삭 노각비빔밥

우아하고 멋지게 늙어가길 바라며

by 정담아

긴급 교과 협의회가 열렸다. 안건은 교내 대회 신설. 이미 수많은 교내 대회가 존재하는 마당에 또 무슨 대회인가 싶었다. 시작은 관리자가 학부모로부터 받은 한 통의 전화였다. 학교 책자에 ○○대회가 명시되어 있는데 대체 언제 열리냐고 물었다는 그 전화. 누군가가 그건 책자의 오류고 애초에 그런 대회는 없을뿐더러 교육계획서에도 없다고 설명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학부모에게 그렇게 말할 수 없으니 당장 대회를 만들어 진행하라'였다고 했다.


이건 뭐지? 귀찮은 일이 하나 더 생긴 건 둘째치고 일이 돌아가는 꼴이 영 이상했다. 평소에는 모든 업무를 교육계획서에 근거해서 처리하라고 강조하더니 꼴랑 전화 한 통에 교육계획서에도 없는 대회를 만들라고? 대쪽같던 원칙이 한없이 유연해지는 순간을 보니 한숨과 실소가 절로 터져나왔다. 더 절망스러운 건 그런 말도 안 되는 말 한 마디에 관련 교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머리를 맞대었다는 것. 나역시 소중한 공강 한 시간을 그렇게 날렸다.


이상한 사람들이 관리자가 되는 걸까, 관리자가 되면 이상해지는 걸까.


조직에 들어와서 늘 궁금했던 질문 중 하나다. 말이 안 되는 일들을 당연하게 지시하고, 말이 안 되는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하는 그들을 볼 때마다 놀라웠다. 가령, 온라인 수업을 위해 모든 교사들은 직접 강의한 콘텐츠를 올리라고 지시할 때였다. 이미 직강을 올리고 있는 교사들이 꽤 있었지만, 그런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모두를 직무유기로 몰아가는 뉘앙스까진 참을만했다. 하지만 뒤따른 말은 정말 가관이었다. 양질의 수업을 바라는 건 아니라고, 그저 우리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자고, 했다. 응?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렸지만 그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의 기개와 당당함에 다시 한번 감명받았다. 직원을 믿지 않는 관리자, 동료를 불신하는 동료, 후배의 기를 죽이는 선배, 그 모든 역할을 멋지게 해내고 있는 그는 실로 놀라운 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금 궁금해졌다.


처음부터 저런 캐릭터였을까. 아니면 시간이 그를 저리 만든 걸까.


어느 쪽이라도 슬픈 결말임은 분명했다. 시간과 함께 좀 더 깊어지면 좋으련만. 이를테면, 노각처럼. 오이를 싫어하는 내게 오이 무침이 반찬으로 올라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늙은 오이라면 괜찮다. 질색하는 특유의 향도 사라지고 식감도 달라 전혀 다른 음식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어릴 땐 그 음식이 늙은 ‘오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해 엄마에게 재차 확인하기도 했다. 이게 진짜 오이가 맞느냐고. 요즘엔 아예 종을 개량한 경우도 있다지만, 내 도시락 속 늙은 오이는 청춘의 푸르름을 지나 노련한 노란빛으로 갈아입은 황혼의 결실이었다. 거칠게 튀어나온 울퉁불퉁함도 세월에 매끈하게 다듬어졌고, 너그러움을 품어 살도 통통하게 더 올라있었다. 부드러운 노각의 속을 파내고 썰어 양념을 넣고 매콤 새콤하게 무쳐낸 노각무침. 이것만 있으면 분노에 사라진 밥맛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흰 밥에 노각 무침을 넣고, 작은 통에 고이 담아온 고추장과 참기름을 넉넉히 둘렀다. 마지막으로 미리 부쳐낸 달걀 프라이도 잊지 않고 하나 얹고 비볐다. 가장 먼저 고소한 참기름 향이 미각을 깨웠다. 한 숟가락 가득 퍼서 입 안에 넣었다. 은은한 단맛을 베이스로 한 탄수화물과 함께 매콤새콤달콤고소한 양념을 품고 있는 노각이 입안에서 환상적인 콤비를 이루었다. 푸른 오이에 비해 부드럽지만 여전히 아삭아삭한 식감이 느껴지는 노련한 노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달걀 프라이 조각이 품은 기름과 밥알에 흐르는 참기름이 전체적으로 빨간 맛을 보드랍게 만들었다. 뾰족하게 나온 스트레스는 매운맛으로 다스리고, 울적하게 가라앉은 마음은 기름칠로 한층 끌어올렸다. 나아진 기분으로, 잠시 찾은 이성으로 다짐했다.


어느 자리에 있든 멋지게 늙어가야지.

keyword
이전 02화씹는 재미가 쏠쏠한, 콘치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