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주는 위로-글쓰기 예찬 3
글은 문자를 쓰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글은 감정이고, 삶이며, 결국 사람이다.
말은 흘러가지만 글은 남는다.
시간이 지나면 말은 잊히지만, 글은 기록으로 남아 글쓴이의 감정과 삶을 고스란히 전한다.
그래서 글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다. 아무 글이나 쓸 수가 없다.
글이야말로 내가 지구 위 어딘가에 살아 있었음을 알리는 유일한 흔적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의 생각을 남기고 전하는, 후대의 작은 자산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식을 낳고 살아가는 것은 유전자를 이어가기 위해서다.
어쩌면 존재를 지속시키는 가장 본능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식이 없는 나는 죽고 나면 무엇으로 존재를 이어가고 기억될 수 있을까.
자식도 남편도 없는 나의 유전자는 내 삶이 끝남과 동시에 휘리릭 사라져버리는 걸까.
누가 나를 쓸쓸하다고 말한 적 없는데도,
누가 눈치를 주거나 구박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를 외롭고 불쌍한 사람으로 느끼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내가 이 세상에 왔다가 갔다는 사실이 신만이 아는 비밀로 남는다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글을 쓰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주장이 억지춘향은 아닐 것이다.
나에게 글쓰기는 생존이자, 대를 잇기 위한 본능이다.
처음부터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쓴 건 아니었지만, 요즘처럼 매일 스스로를 다그쳐 글을 써내는 나를 보면 스스로도 안쓰럽고 한편으로는 대견하다.
‘내가 쓴 글이 얼마나 읽히겠다고 이렇게까지 쓰나?’ 하다가도 ‘이렇게라도 써놔야 마음이 놓이지.’ 하며 나를 달랜다.
글을 쓰는 건 어쩌면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는 일이기도 하다.
흔히 자식을 낳는 심정으로 글을 쓴다고 한다.
내게 글쓰기는 출산의 고통보다는,
나를 닮은 글이라는 자식을 낳고 키우며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일에 가깝다.
나를 닮은 그 자식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오래도록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 그 마음은 여느 부모와 다르지 않다.
글은 나를 혼자가 아니라고 위로하는 소중한 자식이다.
어쩌면 나를 혼자 남겨둔 그 남자가 내게 ‘글’이라는 ‘자식’을 선물하고 갔는지도 모른다.
그가 아니었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내 글은 떠나간 그를 닮고, 지금의 가족과 친구들을 닮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쏙 빼닮았다.
때로는 밉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고, 세상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다.
이제는 뗄레야 뗄 수 없는 혈연관계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글을 쓴다.
내가 쓰는 글은 문자의 나열이 아니라
글로 나를 이어가고, 글로 내 생을 증명하며, 글로 누군가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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