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 패리스,『비하인드 도어 (Behind closed door)』
살인사건을 다루는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한 소재를 다루고 있는 소설의 정형화된 패턴에서 오는 통쾌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대부분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그 살인사건을 풀어나가는 사람이 주변을 관찰하고 조사하여 하나의 결론에 이르는 구조로 되어있다. 하지만 『비하인드 도어』는 많은 살인사건을 다루는 소설과는 다소 다른 이야기 전개를 보인다.
스릴러 장르의 책이나 영화를 좋아한다면 단숨에 읽을 수 있을 만큼 흡입력 있는 책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기존 소설과 다른 점이 있으므로 읽는 내내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도 '범인은 너야!'라는 통쾌함보다는 뱃속 어딘가에서 올라오는 울컥함이 남는 책이었다. 책의 반전과 결말의 즐거움을 읽는 사람에게 남기기 위해 해당 글에서는 책 내용은 최대한 배제하고 내가 떠올렸던 생각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비하인드 도어』에서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장면은 잭 엔젤이 그레이스를 호텔 방에 가둬놓고 나가는 장면이었다. 그레이스는 자신을 벗어날 수 없다고 협박하는 잭을 보며 잭이 나가며 호텔방을 잠겄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문을 열고 나가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음에 그 문이 잠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레이스를 호텔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던 것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잭의 행동과 말이 가져온 공포였다. 그레이스는 공포에 휩싸여 자신을 스스로 그 방에 가두었고 놀랍게도 그것이 잭이 원하는 것이었다. 『비하인드 도어』전반에서 보면 잭은 폭력을 행사하거나 범죄를 행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공포를 즐기고 원했던 만큼 어떻게 해야 사람이 극한의 공포를 느끼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공포란 특정한 사물이나 상황에 대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비이성적이고 극렬한 두려움이다. 잭은 처음에는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해 그레이스가 그 틀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그녀에게서 자유를 빼앗아갔다. 동생을 보러 가지 못하게 했고, 옷을 빼앗고, 시간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그녀가 잭에게 물리적인 위협을 가하자 마지막으로는 그녀를 지하실에 가두었다. 그레이스는 자유를 하나씩 빼앗길 때마다 점점 더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폭력이나 학대, 성추행, 성폭력, 강간 등의 사건에서 종종 우리는 너무 쉽게 '왜 그걸 참고만 있었어?', '가해자가 범죄를 저지르도록 가만히 있었던 것 아니야?'라는 식의 말을 한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에는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회적/ 지위적 위치와 가해자의 말과 행동에서 오는 공포는 보이지 않는 올가미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공포에 대해서 쉽게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1) 피상적으로 상당한 매력과 평균 또는 그 이상의 지능
2) 망상 또는 기타 비합리적 사고가 없음
3) 불안이나 다른 ‘신경증’ 증상이 없음. 상당히 침착하고 유창함
4) 신뢰성이 떨어지고, 책임을 등한시함 : 거의 중요하지 않거나 크게 중요한 일들에
대해서는 책임감이 없음
5) 진실되지 못하고 성실치 못함
6) 자책과 수치심이 없음
7) 적절한 동기가 없고 잘 계획되지 않으며 불가해한 충동에서 일어나는 반사회적 행동
8) 판단력이 빈약하고 경험을 통해 학습하지 못함
9) 병적으로 이기적이고, 완전히 자기중심적임 : 참된 사랑과 애정을 나눌 능력이 없음
10) 일반적으로 깊고 지속적인 감정이 빈곤함
11) 참된 통찰력이 부족하고 제삼자의 안목으로 자기 자신을 보는 능력이 없음
12) 특별한 배려, 친절 및 신뢰에 대해 배은망덕함
13) 음주 후나 때때로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조차 괴상하고 불쾌하게 행동함 : 천박하고
무례하며, 기분이 자주 바뀌고 짓궂음
14) 진짜로 자살을 기도한 적이 없음
15) 성생활 개성이 없고, 무의미하며,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함
16) 세워놓은 인생의 계획을 제대로 따르지 못함
허비 클렉 클리『온전함의 가면 (Mask of Sanity), 1941』
이 책을 읽으면서 사이코패스의 정의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명확한 한 줄짜리 정의는 나오지 않지만 여러 학자들이 정의해놓은 다양한 정의들이 있었다. 그중 허비 클렉 클리의 『온전함의 가면』이라는 책에 나오는 사이코패스를 정의한 목록이 흥미로웠다. 이 목록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비하인드 도어』의 주인공 잭 엔젤이 떠올랐다.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은 단순히 범죄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회에서 타인과의 사회관계 속에서 반사회적 반윤리적인 행위를 함에 있어 어떠한 죄책감도 가지지 못하는 사람, 타인에 대한 공감과 사회적 책임의식 결여에서 오는 병적 자기애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비하인드 도어』에서도 주인공 잭 엔젤은 살인이나 폭력 등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는 아니었지만 반윤리적인 행동을 계획하고 행동함에 있어 어떠한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으며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존재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하인드 도어』에 나오는 잭 엔젤이 모습은 끔찍하다. 글자로서 마주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넘길 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의 모습이 더욱 현실처럼 다가오는 것은 사이코패스가 소설에만 등장하는 허구적인 요소가 아닌 우리가 사는 사회에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사이코패스에 대한 정의와 선천적인 영향인지 후천적인 영향인지에 대한 논란은 존재하지만 그래도 확실한 것은 실제로 이러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를 더 오싹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살인사건을 소재로 하는 소설을 보면 살해를 당한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생전에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해서 죽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하지만, 『비하인드 도어』에서는 살인을 다루고 있지만 살인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더 집중하게 만든다.
페이스북에서 지나가는 글에 지하철에서 성추행 또는 몰카를 당하는 경우 "왜 이러세요!!!"라고 소리치면 모두 다 피해자에게 시선이 쏠리게 되므로 "야 이개XX야!!!"라고 크게 외치면 그 사람이 누구인가 사람들이 가해자를 찾게 된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가볍게 웃고 지나갈 수 있는 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사건에서 피해자들이 왜 도움을 구하지 못하는지, 어떠한 시선을 받게 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비하인드 도어』를 읽으며 처음에는 주변에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그레이스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책에 더 몰입할수록 왜 그런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잭은 주변 사람들에게 그레이스가 도움을 청할 것을 예상하여 정신이 불안정한 여자로 그레이스를 소개했다.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믿기 어려운 소리를 하는 여자보다는 끔찍하게 아내를 아끼는 잭의 모습이 더욱 신뢰가 갔을 것이다. 또한 그레이스는 여러 번의 시도를 통해서 점점 더 공포에 휩싸여갔고 그 공포는 그레이스를 주변의 도움을 청하는 것으로는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레이스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빼앗고 자신의 전부인 동생을 자신과 같이 만들려고 하는 잭을 살해했다. 이 책은 그렇게 결말을 맺는다. 책을 덮고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