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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Park Apr 15. 2019

당신의 존재, 그 참을 수 없는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영원한 회기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트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유명한 첫 문장이다. 니체가 철학자들을 곤경에 빠트린 것만큼이나 이 문장은 많은 독자들을 곤경에 빠트렸다. 이해하기 어렵다면 1-2 부분을 건너뛰고 읽으라는 글을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만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 어려운 문장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영원한 회기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기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기가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영원한 회기의 무거움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가벼움. 작가는 이 책을 통해 계속해서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의 대조와 그 속에서 모순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그 모순을 표현하기 위하여 4명의 인물을 만들어 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토마시와 테레자, 사비나와 프란츠 이들 삶과 그들이 살아간 사회가 뚜렷하게 보이는 현실이자 소설이다.


#1

타인이란 존재는 때론 우주만큼 커져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삶에 깊숙이 들어오기도 하며, 때로는 너무 가벼워 깃털처럼 날아가 잊혀지기도 한다. 마음의 저울의 한쪽에 타인을 올려놓고 그 반대편에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의 무게를 올려 놓는다고 했을 때 그 무게는 시간에 따라서 변화하기도 하며, 그 저울에 올라가는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무거움과 가벼움은 인생의 방향성을 결정하고 관계 속에서 타인을 대하는 표현의 방법이 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속  신분 상승의 욕구를 자기 자신이 아닌 토마시에게 투영한 테레자에게 타인의 존재는 무겁고 그녀의 삶은 타인의 무게를 견디느라 힘겹다. 

테레자는 발가벗은 다른 여자들과 함께 수영장 주위를 행진했다. 토마시는 천장에 매달린 바구니 안에서 서서 큰 소리로 외치며 노래를 부르고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어떤 여자가 동작을 틀리면 그 여자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 

테레자에게는 이 세상 전부보다 큰 존재인 토마시이지만, 자신이 토마시에게는 수많은 여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이 테레자에게는 견디기 힘든 현실이지만 자신을 위해 견뎌야 하는 현실이다. 이처럼 그 둘 사이의 모순은 테레사에게 위와 같은 기괴한 꿈으로 나타난다. 


나에게는 전부인 이 사람에게 내가 전부가 아닐 때, 모든 관계의 문제의 시작은 이 작은 모순에서 시작된다.


이 작은 모순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리기도 하지만 그 누구의 잘못으로 떠넘길 수도 없다. 어떠한 사람은 이별을 쉽게 극복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큰 열병을 앓기도 한다. 한때는 나에게 무거운 존재였던 그 사람이 가끔씩 꺼내어 볼 때 얕은 미소를 띠게 하는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진 모습을 본다. 우리 인생에서 끊임 없이 반복되는 만남이란 토마시가 테레사와의 첫 만남을 여섯 우연이 겹친 우연한 일로 바라보아야 할까, 아니면 테레사처럼 자신의 삶을 구원해줄 운명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책의 주인공들의 삶을 보면서 인연이라는 것도 우연이라는 것도 믿기 어려워진다.


이 책에서 작가는 토마시와 테레사, 무거움과 가벼움 그 어느 쪽의 삶이 더 가치 있는 삶이다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주인공 모두 나름대로의 삶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며, 모든 행동과 생각의 이유가 존재하고,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살아간다. 그 고민 속에서 어느 한쪽에 절대적인 가치를 놓을 수 없는 이유는 사람은 언제나 변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했던 한 여자가 지금까지 만났던 수많은 여자 중에서 다시 생각나고 그리워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관계의 문제의 시작이라 말했던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의 모순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속 토마시와 테레사의 삶 속 모순의 바닥을 보면서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특히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먼저 놓아야 할 생각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해 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단순하지만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이 생각이 테레사를 절망으로 이끌었고 토마시를 변화시켰다. 사랑하는 사이와 관계 속에서 각자의 사랑의 방식이나, 표현의 방식, 그리고 더 깊이는 사랑을 정의하는 방식까지 다 다르다. 우리는 그 차이를 분명히 알면서도 내가 사랑한 만큼 사랑받기를 끊임없이 원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관계에서 상처 받으면서도 삶의 희망을 보고 또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2

토마시와 테레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무거움과 가벼움의 대조는 사비나와 프란츠의 삶에서는 조금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이것은 감상적이었던 19세기 중엽에 생겨나 그 이후 다른 모든 언어에 퍼졌던 독일어 단어이다. 그러나 그 단어를 자주 사용함에 따라 그것이 지닌 원래의 형이상학적 가치가 지워졌는데, 말하자면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적대적 부정이다. 문자적 의미나 상징적 의미에서 그렇다.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키치'라는 말은 그 어원도, 쓰이는 의미도 다양하다. 독일어 단어라는 작가의 말을 따라가자면 그 어원은 '거리에서 쓰레기를 모으다'라는 뜻의 'Kischen'과 '싸게 팔다'라는 의미를 가진 'verkischen'이라는 동사에서 찾을 수 있다. 사비나에게 있어서는 키치란 똥에 대한 적대적인 부정이다. 그렇다면 똥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어린 나는 순간적으로 똥과 신은 양립할 수 없으며 또한 인간이 신의 모습을 본떠 창조되었다는 기독교의 인류학적 근본 명제가 지닌 허약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이다. 둘 중 하나다. 인간은 신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고 따라서 신도 창자를 지녔거나, 아니면 신은 창자를 지니지 않았고 인간도 신을 닮지 않았거나


윤리적인 이유를 배제하고서도 똥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스스로도 똥과 신을 함께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신성모독이라고 여기는 것. 똥의 존재에 대한 부정은 사비나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키치의 세계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내가 드러내고 싶은 것 만을 드러내는 뻔뻔함, 그러한 것을 강요하는 사회의 책임감. 사비나는 그 키치를 아버지에게서, 사회주의 군중의 시위 속에서 느낀다. 그리고 그 무거움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친다.


그녀는 토마시가 중산모자를 쓴 그녀를 화장실 변기에 앉히고 자기 앞에서 창자 속을 비우라고 명령할 거라고 상상했다. 그녀의 가슴이 미친 듯 쿵쾅거리고 생각도 희미해져서 그녀는 토마시를 양탄자 위에 쓰러트렸다. 


그녀는 죽는 그 순간까지 가벼움을 원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사랑 또한 '가벼운 것'이어야 했다. 그렇기에 가벼움을 추구했던 토마시와의 만남에서 사비나의 느낌을 위와 같이 표현해 내고 있다. 반면 프란츠는 무거움에 대한 동경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이다. 그는 사비나가 평생 벗어나고자 했던 그녀의 '키치'를 사랑했다. 그는 사비나의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비나가 가지고 있었던 '키치'를 동경했다. 하지만 공산주의 시위 대의 군중 속에서 편안함을 느꼈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키치를 쫓아 길을 떠났던 캄보디아에서 그 누구보다 가벼운 죽음을 맞이한다. 


무거움과 가벼움을 눈에 보이게 만든다면 천징의 양옆에 나란히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가 경계선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뒤섞여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깊게 들었다. 누군가에게는 타인이라는 존재가 언제 그 사람을 알았는 듯이 잊혀 갈 수도 있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뒤흔드는 열병을 앓게 할 수도 있다. 또 한때에는 나에게 우주보다 더 큰 무게로 삶을 지배했던 그 사람이 깃털보다 더 가벼워져 지나쳐갈 때도 있다. 키치와 같이 어려운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그 사이의 미묘함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


#3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낯선 시대적 배경은 우리가 소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더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소설은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짧디 짧았던 '프라하의 봄'의 찬란한 순간이 아닌 그 순간을 지나 변화한 그 시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1968년 소련 침공 이후 프라하

프라하의 봄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기를 뜻한다. 1968년 1월 슬로바키아의 개혁파 둡체크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을 들고 집권을 시작하면서 프라하의 봄은 시작되었다. 이는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며, 국외여행과 이주의 자유를 보장하고 경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그 찬란했던 봄은 그 해 8월 소련이 주도하는 바르샤바 조약기구 군대가 무력으로 프라하를 침공하였다. 사진작가로 활동했던 테레사의 사진 속 담겼던 소련군과 탱크, 그리고 그 앞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 그 장면은 1968년 8월 이후 프라하의 모습이었다. 


국민들의 행복한 도취는 점령 후 일주일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체코 정치인들은 잡범처럼 소련군에게 끌려갔고,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모든 사람이 그들의 안위를 걱정했고, 소련군에 대한 증오는 술기운처럼 치밀어 올랐다. 증오감에 도취된 축제였다. 보헤미아의 도시는 손으로 그린 포스터로 온통 뒤뎦였다. 포스터에는 냉소적 글귀, 서시, 시구절, 브레즈네프와 그의 군대 캐리커처가 자극적으로 표현되었다. 그의 군대를 일자무식한 광대 집단이라고 조롱하는 포스터였다. 그러나 어떤 축제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그가 이토록 생생하게 그 당시의 프라하를 묘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그 시대를 직접 살아냈기 때문이다. 프라하의 봄을 지나 소련의 침공을 마주했다. 그는 소련의 탄압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한 수많은 지식인 중 하나였으며,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하였고 자신의 조국 땅에서의 그 일을 써 내려갔다. 


그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은 토마시가 살아온 삶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오이디푸스 신화'에 빗대어 공산주의자들의 책임을 묻는 기사를 쓴 후 자신이 의도와는 다르게 잘려 나간 칼럼으로 인해 외과 의사로서의 삶을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된다. 그는 정치적 압박을 받으며, 잘 나가는 외과의사에서 작은 시골 병원 의사로, 그 이후에는 '한 때 의사였던' 유리 닦는 노동자의 삶을 살아간다.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는 토마시가 자신이 지향했던 가벼운 삶을 지탱하게 해 준 외과의사의 삶을 빼앗기게 되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의 삶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테레사를 찾으며 마지막에는 그녀와 함께 시골에서 삶을 마감한다. 


우리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등장인물의 삶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들의 생각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이 머물렀던, 그 생각에 영향을 주었던 그 시대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개인의 가치관과 신념도 삶을 채워나가는 데에 있어 중요한 방향성을 제시하지만, 그 속에서 사회적 배경이나 정치적 상황이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고전소설을 잘 읽지 않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시대적 배경의 차이에서 오는 거리감 때문인 것 같다. 똑같은 생각도 시대적 배경에 따라, 살고 있는 사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 읽으면서 다른 고전을 읽을 때에도 그 소설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느꼈다. 


등장인물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나 테레사의 카네린에 관해서도 살펴본다면 흥미로운 생각이 떠오를 것 같다. 하지만, 그 모든 생각이 이 글에 담기 보다는 다음으로 미뤄두면 좋을 것 같다. 그 생각들은 시간이 지나 또 다시 한번 이 책을 꺼내어 볼 때 또 다른 감정으로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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