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봐온 많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하루하루 정말 열심히 살아가는 것 같아. 공부도 일도 무엇이든 열심히 최선을 다해."
"그러면서도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이 불안해 보이기만 해. 너는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그러자 그녀의 모니터 속 화면의 커서가 깜빡이며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챗GPT는 그런 질문 따위는 전혀 어렵거나 고민할 거리도 없다는 듯 단 2초 만에 답을 내어주기 시작한다.
"안녕! 질문해 줘서 고마워."
"너는 대한민국의 빠른 발전과 경쟁적인 사회 맥락에서 많은 사람들의 삶의 한 측면을 중요하게 관찰한 것 같아. 많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열심히 일하곤 해."
"그 이유는 바로 사회, 가족,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강한 의무감과 높은 기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
"이런 성공을 향한 끊임없는 추구는 때때로 시간이나 사회적 압박에 쫓기는 느낌과 불안감을 초래할 수 있어. 이건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요인에 뿌리를 둔 복잡한 문제야."
그녀는 챗GPT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였다.
막연하게 알 것 같으면서도 무어라 말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던 것들을 챗GPT의 명쾌한 답변으로 확인받은 마냥 속이 시원해졌다.
그러다가 그녀는 문득 이유를 알 수 없는 찝찝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살아본 경험이라고는 전혀 없는 챗GPT는 마치 전지전능한 입장에서 한국인의 불안심리 원인을 꿰뚫고 있는 듯 한 치의 고민이나 망설임도 없이 답을 내어주었다. 신과 같이 전지전능한 AI 같았다.
AI는 앞으로도 언제나 늘 우리의 곁에서 '답을 묻는 사람들'에게 '답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 '답'은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텍스트의 조합으로서 주어질 뿐이다. 챗GPT는 정작 불안을 느껴본 적도 없고 대한민국의 문화를 경험해 본 적도 없이 확률적 가능성에 근거해 가장 그럴듯한 언어를 생산해 내는 기계일 뿐이다. 그것이 챗GPT로부터 명쾌한 답변을 받고 나서도 우리가 또다시 문득 찝찝한 기분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그 근본적인 이유다.
이 글을 읽어주실 독자 여러분과 나는 지금껏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각 개인이 여러 가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지식 정보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잠깐! 우리 잠시 인생의 시간표를 50년만 앞으로 되돌려 1970년대로 돌아간다고 상상해 보자.
50년 전 그 시절을 우리가 살아가야 했다면, 어쩔 수 없이 우리 모두는 무언가 당장 궁금한 게 생긴다 한들 오랜 시간 혼자 끙끙 앓으며 고민하는 시간을 견뎌야만 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인터넷 사용도 불가능하고 경제적 생산성을 확보하는 국가의 주요 산업 요인이 '농업'에서 '대량생산 공업화'로 서서히 변화해가고 있던 그때 그 시절에는 인터넷은커녕 '종이책'도 구하기가 매우 귀한 시절이니 말이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그때는 다가가서 무언가를 여쭈어보기가 참으로 어렵게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듣고 무심결에 간편히 답을 주기 어려운 문제 같은 질문을 어디 감히 쉽사리 건네어볼 수 있었을까?
그러한 시절이니 우리 모두는 인생을 살아가다가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불안감을 느낄 때마다 '홀로 사색하는 시간' 안에 자신을 가만히 놓아두어야만 했을 거다.
명쾌한 깨달음이 머리 위를 스쳐가는 그 순간이 찾아올 때까지 인내하며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려보고, 먼 길을 힘들게 찾아가야 하는 수고로움을 견뎌가며 종이책이 많은 서점 어딘가를 서성거렸을 거다.
지금의 우리 삶과 비교하면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것들이 너무나 많은 과거 그 시점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가 불확실함에 불안을 느꼈을 것이고 현재 자신이 고수하고 있는 삶의 방식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관해 의심했을 거다. 과거에 대한 후회를 하고 현재 삶의 방식을 성찰하며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려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니 우리가 어느 시대에 태어났건 무관하게 비슷한 고민을 했을 건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2020년대 우리 각 개인이 느끼고 있는 불안이 과거 그 어느 시대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임을 직관한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은 훨씬 더 그 강도가 치명적이다. 왜냐고?
이 시대 각 개인이 느끼는 불안은 '존재론적 정체성의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자, 곰곰이 생각해 보자. 우리 모두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기간 동안 모두 '몸'을 가지고 삶을 영위한다. 인간이 바깥세상의 지식과 정보를 수용하고 해석하여 스스로 자신만의 삶의 가치관과 신념을 세워나갈 때 그 인생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안정감을 구축하게 되는 거 아닐까? 우리에게 '몸'이 없다면, 즉 '눈'이 없어 볼 수 없고 '귀'가 없어 들을 수 없다면 어떻게 감히 세상 밖의 지식과 정보를 수용할 수가 있는가?
놀랍도록 진귀한 전자 기술이 발달하고 있지만 어쨌거나 가장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근본이자 소중한 삶의 도구는 바로 자기 자신의 '몸'이다. 우리는 몸의 여러 감각을 통해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세상과 조우하는 자기 존재를 알아차리게 된다.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신체 감각으로 느껴지는 모든 것들을 온전하게 바라보고 수용할 수 있어야만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의 존재도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식과 정보로 가득한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 지구별은 인간 각 개인이 신체로 느끼는 주관적 감각과 느낌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신체로 느끼는 주관적 감각과 느낌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자기 스스로의 존재를 온전히 인식할 수 있는 통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훨씬 더 유용한 고급 지식 정보들이 끊임없이 생성되어 쏟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 정보를 더 빨리 흡수하고 적용하는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 된다고들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그렇게 정보를 습득하고 또 활용하며 그것을 뽐내느라 모두들 자기 삶에 주어진 대부분의 시간을 정보와 씨름하며 산다.
정보는 명료한 개념으로서 논리의 인과에 따라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시대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식과 정보가 곧 우리 삶을 윤택하고 더 나은 것으로 바꿔줄 것이라 확신하며 살아간다. 지식과 정보로 치환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느낌 따위는 너무 쉽게 그 가치를 평가절하 당한다.
지식과 정보를 빠르게 추구하느라 정작 몸을 통해 느껴지는 자기 자신의 주관적 세계관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다. 우리는 그렇게 나 자신을 잃어간다. 이 시대에 태어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듯 어쩔 수 없이 내게 주어진 삶의 많은 시간들을 지식과 정보 습득을 위해서 보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각 개인의 존재는 감각과 느낌을 잃어버린 '지식과 정보 덩어리'로 변모해가고 있다. 시시각각 꿈틀대며 생명의 전기 신호를 보내고 있는 우리 몸의 신체 감각들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애매모호한 직관의 언어로 몸의 주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몸의 주인인 우리 모두는 자신이 몸의 주인인 것도 잊어버린 채 광활한 정보의 바다 위에 표류하며 쉼 없이 열심히 노를 젓는다.
그런데 너무 슬픈 건 아무리 열심히 노를 저어도 점점 더 허무해지는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노를 젓는가?'
'나는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 열심히 노를 젓는가?'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점점 더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듯 서글퍼진다. 아무리 고급 정보를 습득하고, 화려한 개념어로 자기 인생을 정의 내려 보아도 그 서글픔과 헛헛함은 쉽사리 사라지지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