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치료 시간인데 가기 싫다

물리치료사의 마음 이야기(아픔과 시간)

 환자한테 가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치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매일 같은 시간에 만나는 환자임에도 가기 싫은 날. 치료 테이블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분을 향해 가는 것이 유난히 힘든 그런 날이다.


 언제나 치료실은 사람 냄새와 치료 소리로 가득하다. 어수선함 속에서도 남겨지는 건 결국 환자와 나. 치료 시간이 되는 순간부터 둘만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주변이 아무리 시끄럽고 복잡하더라도 누구도 끼어들지 못하는 우리들의 영역에서는 누구의 개입도 허락하지 않는다. 뒤집어 생각해 본다면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환자와 보내야 할 수밖에 없다. 피할 수도, 피해지지도 않는 고독한 시간이다.

 매시간을 웃으며 함께하면 그렇게 힘들지 않을 수 있다. 몸은 조금 고되더라도 뿌듯함에 즐거움이 더해져 행복한 일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내할 자신도 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은 누군가의 아픔으로 생겨난 직업. 다른 이의 고통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 시간은 언제나 타인의 아픔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아픔이 내가 감내할 수 있는 기준치를 넘겼을 때, 나는 치료에 가기 힘들다.     


 아픔은 주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몸에서 나오는 증상과 마음에서 나오는 증상. 몸에서 나오는 증상은 환자의 몫이다. 우리는 돕는 역할일 뿐. 이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반대로 마음에서 나오는 증상은 나의 몫이다. 알면서 혹은 알지 못하면서. 가시 돋친 비난도, 절규도 뱉어낸다. 이를 받아내는 것이 나의 몫이다.

 기계에 묶여 움직이지도 못한 채 인위적으로 몸을 세우고 있으면 무슨 생각이 들까? 심지어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며 예후가 좋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듣고 있다면 그 기분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나에게 치료받으러 올 환자가 이 모든 상황을 겪고 있다. 분노와 절망에 몸부림치며 기계에서 움직일 수 없는 몸을 흔든다. 앞으로 10분 뒤면 치료가 시작된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치료를 해야 할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아픔은 인간의 내면에 가장 가까운 신호 중 하나이다. 모순적이게 고통을 피하기 위해 이 신호는 최후의 순간까지 우리를 붙잡고 있는다. 놔줄 것이라는 희망이 무력해질 만큼 강한 힘으로 우리를 움켜쥘 때 사람은 나약함을 느끼게 된다. 나약함은 아픔을 더욱 극대화시켜 버린다. 그런 모습으로 우리는 서로를 만난다.     


 무슨 위로를 할 수 있겠는가. 한 분야의 전문가라는 이유로 드리는 어중간한 위로나 충고는 상대방을 더 힘들게 할 뿐이다. 치료를 진행해보려 하지만 이미 함께하는 치료가 아닌 혼자 하는 치료가 되어 버린 지 오래. 협조를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몸도 마음도 이미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 들어간 순간. 치료사가 아닌 방관자의 모습으로 우두커니 남겨진 기분이 든다. 드라마처럼 멋진 한마디에 극적으로 환자의 마음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 어떤 말이라도 하고 싶다. 이런 기분으로 남겨지는 것보다는 말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건 시간이다. 마치 겨울밤, 찰나의 순간에 마음밭을 얼려버린 원망스러운 시간이 어느덧 햇빛을 품은 시간이 되어 녹여주는 것처럼 아픔을 받아들이는 시간. 위로를 받아들일 때까지 부드러워지는 시간. 그것이 충족되어야 위로도 치료도 시작될 수 있다.


 밤이 깊어지는 만큼 아침은 가까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하지만 상황을 마주하며 감내하는 순간은 언제나 쉽지 않은 법. 환자와 함께하는 그 시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치료 시간 덕분에 치료가 가기 싫은 그런 날이 있다.

이전 17화 숨결이 흐를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