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고단한 업이 하나 있다. 권리보다는 책임이 더 막중하다. 결과를 기대하고 업을 행하지는 않지만 결과의 평가는 어느 누구보다 모질게 받는다. 전 세계 누구라도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나 결국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감당하는 이렇게 가혹하고 모진 업. 바로 부모(父母)이다.
보통 보호자가 자식인지, 부모인지에 따라 풍기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전자의 경우 보호자를 둘러싼 공기가 많이 유한 편이다. 치료 경과에 따른 압박도 적고 치료 외적인 스케줄 등, 기타 사항에 대해 예민함이 짙지 못하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마치 패전을 앞둔 결사 항전의 병사와 같달까. 아이를 중심으로 배수의 진을 친 부모의 모습을 볼 때면 긴장감에 나까지 곤두서는 기분이다.
공격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든 아이를 낫게 하겠다는 부모의 일념을 표현한 것에 가깝다. 아이가 아프면 부모는 알게 모르게 스스로 죄인이 된다. 누가 죄인 취급을 하지 않아도 잘못을 고하며 아이를 양육한다. 죄인 된 이의 낮은 자세로 아이를 병으로부터 구해내겠다는 목적 하나로 세상을 살아간다. 이를 어느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저 그들이 두르는 공기에 휩쓸리지는 않을까 주의할 뿐이다.
아이는 언젠가 부모의 품에서 독립한다. 태중의 아이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차츰 부모로부터 멀어지는 법을 배워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아픈 아이는 이를 완전하게 배우지 못한다. 안타깝지만 아이를 품는 업이 평생에 부모에게 남는다.
얼마 전 한 아이가 치료를 받으러 왔다. 소아 환자기는 하지만 청소년기의 학생에 가까운 아이였다. 로봇을 태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님께서 치료실로 들어오셨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 안부를 여쭤보았다. 그렇게 시작한 대화는 몇 마디 지나지 않아 결국 눈물까지 이어졌다.
그동안에 듣지 못한 긴 이야기를 들었다. 시작은 이러했다. 다른 치료 시간에 함께 치료받던 환자가 있었다고 한다. 여태까지 대화할 기회가 없었는데 보호자와 기회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환자의 나이가 나오게 되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환자의 나이가 많았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던 환자가 30대를 넘겼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크나큰 충격에 빠지셨다.
충격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를 알 수 있는 이들은 아픈 아이를 둔 부모뿐이다. 나이를 듣게 된 순간 자신은 아직 멀었구나라는 생각이 드셨다고 한다. 각자의 고통에 상하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배 이상 아이를 보살펴 오신 다른 보호자의 모습을 보며 온갖 감정이 교차하신 것이다. 스스로의 힘듦보다 더 오랜 시간 버틴 보호자로서의 모습을 보며 아직 멀었다는 생각,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랜 시간 아이를 돌봐야 끝이 날까 하는 생각. 생각에 생각이 맞물리며 눈물이 눈가로 차오르셨다.
앞선 이야기를 시작으로 아이가 아팠던 지금까지의 일들을 들을 수 있었다. 차트에는 나오지 않는 환자와 보호자로서의 삶. 끝나지 않는 기나긴 여정. 아이가 커갈수록 치료받을 수 있는 곳이 적어지는 현실. 이 모든 것들이 부모의 공기를 바꾸어 놓았구나 싶었다. 아이가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부모는 끝없는 싸움을 해나가야만 한다.
누군가 나에게 이런 비유를 해준 적 있다. 정상적으로 자라는 아이와 두 손과 발 모두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 아프지 않은 아이가 때가 되어 손을 움직였다. 반면에 아픈 아이는 십여 년 만에 손을 꼼지락 움직였다. 과연 내가 부모라면 어느 순간에 더 벅찰까? 비유는 하나의 예시이나 내가 치료사로서 알 수 있었던 화면 밖의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야 부모가 풍기는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감할 수 있다.
태중에서 나온 후에도 평생에 아이를 품고 살아가는 이들. 언젠가는 아이들 스스로가 살아갈 수 있을 날을 꿈꾸는 부모의 업을 조금이나마 받쳐주는 작은 손길들이 많아지는 세상을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