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에 거점이 생겨난다. 거점을 중심으로 인프라가 형성되고 나면 이를 잇기 위해 길이 생겨난다. 많은 사람이 지나다닐수록 길은 커지고 제반 시설이 복잡할수록 길은 여러 갈래로 뻗기 시작한다. 주요 시설이 안정되고 이후 수순은 대부분 길을 만드는 것으로 귀결되어진다. 거점의 발전이 끝날수록 중요도는 뒤바뀐다. 거점이라는 하나의 지역보다 여러 곳을 연결해주는 길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길을 중심으로 세상은 열린다. 그 순간부터 길은 단순한 통로 이상의 의미를 담기 시작한다.
우리 몸에는 뇌와 척수를 총칭하여 중추신경이라는 조절 장치가 존재한다. 뇌가 몸의 요소, 요소를 조절하는 컨트롤 타워의 역할을 한다면 척수는 이 신호를 연결해 주는 중계소 같은 역할을 한다. 단순한 길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중추’라는 거대한 타이틀이 붙은 만큼 척수는 단순한 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한 번 다치면 회복되기 쉽지 않을뿐더러 몸에 씻을 수 없는 장애를 남긴다. 아무리 컨트롤 타워에서 바른 결정을 하더라도 이를 운반할 길이 끊겨 있다면 의미 없는 신호가 된다. 좋은 정보가 올바르게 갈 수 있도록 척수는 길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척수는 단순히 운반로의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길을 오가는 사람을 정리해주는 교통경찰분들처럼 척수 자체에도 오가는 신호를 통제해주는 장치들이 있다. 우리 몸에 들고 나는 신호들이 모두 필요하진 않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극들과 우리 몸에서 자체적으로 조절해주는 신호들이 적절하게 맞물려야 우리 몸은 필요에 따라 알맞게 움직일 수 있다. 그 덕에 우리는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척수. 길의 역할을 한다지만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척수를 상상하려면 계단을 상상하면 쉽다. 수평으로 뻗은 길과는 다르게 계단은 층을 만들어 준다. 층을 형성하게 되면 층별로 필요한 시설이 입점이 되고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찾아가게 된다. 이처럼 척수라는 계단은 각층별로 필요한 신호를 보내고 이를 선별하여 필요에 맞는 반응을 만들어 낸다. 이 같은 특성 때문에 척수는 다치게 되면 층별로 나타나는 증상이 뚜렷한 편이다. 예를 들어 경추 5번 손상이라 했을 때 이 환자는 팔꿈치를 구부리고 어깨를 움직이는 정도의 움직임 외 다른 동작은 불가능하게 된다. 이와 다르게 요추가 다치게 되면 상체와 골반까지는 큰 이상 없이 동작이 나오나 다리의 동작이 불가능하게 된다. 이처럼 신호가 머리에서부터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 즉 계단이 무너졌을 때 어느 층까지 갈 수 있는가에 따라 환자의 기능이 결정된다.
척수를 다친 환자의 경우 인지는 정상이므로 이 모든 과정을 스스로 견뎌야 한다. 머리로는 움직이려 하고 있으나 몸은 움직이지 않는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더 힘든 과정을 거치게 된다. 생각은 마음을 만들어 내고 마음은 행동을 구현해낸다. 척수를 오가는 것들을 단지 신호로 여길 수도 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결국 마음이다. 내가 품고 표현하기 원하는 것들. 안타깝지만 환자들의 평생소원은 마음에 품은 동작을 자신의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기에 표현될 수 없는 마음이 몸 안에서 맴돈다.
동아프리카의 길에 대한 속담 중 이런 말이 있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곧 길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길을 잃어야 그 길을 깨닫는다. 길을 걷는 중임에도 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듯 하루에도 수 만 가지 생각을 전하는 척수라는 길을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길이 길로서 의미를 갖는 것은 서로를 연결하여 전하기 때문. 지금도 마음을 전하는 척수라는 길을 잃어버리기 전에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