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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람답게

물리치료사의 몸 이야기(뇌의 기능)

 1848년 9월 13일. 미국 버몬트주 철로 공사 현장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피해자는 해당 공사의 감독관으로 근무 중이던 20대 청년 피니어스 게이지. 1미터 정도의 쇠막대기가 왼쪽 뺨을 지나 오른쪽 머리 위를 관통하게 되는 참사로 이어진다. 하지만 사고로 끝날 것만 같았던 이 폭발은 아무도 예상치 못하게 뇌과학의 역사를 바꿔 버린다.

 당시 의학으로는 소생 불가능한 손상을 입었다는 판정 하에 아무도 피니어스 게이지의 생존을 기대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확신한 상황.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빠른 회복을 보였고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기존에 하던 철로 공사 현장으로 복귀가 가능한 정도의 기능을 보였다는 것이다. 1800년대의 상식에선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었다. 머리에 9cm의 구멍이 뚫리고도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직업으로 복귀까지 하다니. 모두를 경악에 빠뜨리는 사건이었다. 종합적인 의학적 판단 기준이 현대보다는 세부적이지 않다 보니 피니어스 게이지는 약간의 장애를 제외하고는 정상인으로서 사회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그는 남은 생애를 온전하게 마칠 수 있었을까? 안타깝지만 앞서 적은 바와 같이 당시 의학적 판단 기준은 세부적이지 못했다. 신체적 변화에서는 정상 범주 내에 있었으나 정서적 변화를 판별하지 못했다. 이런 오류를 감별하지 못한 채 사회로 돌아간 피니어스 게이지의 문제는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나기 시작했다.

 평상시 온순하고 성실하며 맡은 작업에서 인내심 많은 성격으로 주변의 평가를 받았던 그이지만 사고 후 180도 돌변한 성격으로 주위를 한 번 더 놀라게 했다. 화를 자주 내고 변덕이 심하며 상스러운 말을 내뱉은 무례한 청년이 되었다. 그리고 끈기를 요하는 숙련도가 높은 작업에서 인내심을 보이지 못해 효율이 떨어지고 감정 기복이 심해진 피니어스 게이지는 주변 사람들과의 싸움이 잦아졌다. 결과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 지속에 대한 어려움과 업무 지속의 어려움을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된다.     

 이런 결과는 그 시대를 살아가던 뇌과학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당시 뇌를 이해하는 방식은 두 가지 주장으로 나뉘었다. 뇌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하나의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 부분이 손상받으면 그 기능이 다른 곳으로 넘어간다고 믿는 학파와 다른 하나는 뇌의 부분 부분은 특정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며 해당 기능을 담당하는 곳을 다치면 영원히 회복되지 못한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각 학파가 이렇게 다른 주장을 펼치며 첨예한 대립을 세웠지만 그 어느 것도 피니어스 게이지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쇠막대가 머리를 관통한 청년 한 명이 가져온 파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현대 과학은 전두엽 손상이라는 진단과 함께 위의 주장을 섞어서 설명한다. 전두엽은 성인이 되는 시점까지, 즉 최후에 발달을 마치는 뇌의 영역이다. 그만큼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지혜의 산물이라 표현할 수 있다. 사회적 행동을 통해 도덕적 판단을 하고 미래를 예측 결정하며 행동을 조직, 계획한다. 이렇게 계획된 행동을 집행하는 곳. 그곳이 전두엽이다. 그래서 전두엽이 손상되면 행동불능(Apraxia), 실인증(Agnosia), 실독증(Alexia), 실서증(Agraphia), 기억상실(Amnesia), 얼굴인식불능(Prospagnosia) 등 다양한 병변이 생긴다. 그리고 가장 큰 특징으로는 무미건조한 정서를 바탕으로 한 폭력성과 자기 통제의 결함을 통해 사회생활을 어렵게 한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계획이 결여되다 보니 예측이 없는 의미 없는 행동이 이어지게 된다. 본인 행동에 대한 결과를 생각하지 않다 보니 도덕적 결함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를 알아보기 위한 재미있는 실험이 있다. 약물 중독으로 인한 반사회성 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과 체계적 살인 등의 범죄를 저지르는 반사회성 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비교한 결과, 전자의 경우 전두엽의 기능이 감소된데 반해 후자의 경우 전두엽의 사용이 일반인과 비슷한 수준에서 보였다. 해당 실험을 통해 전두엽을 통한 도덕성 결여는 계획능력과 관계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만 보면 사고가 일어났던 당시의 주장 중 뇌는 분할되어 특정한 기능만 담당한다는 주장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주장이 간과한 것이 있다. 뇌는 계속 변한다는 사실이다.

 비록 피니어스 게이지는 사고가 난 지 7년 후 뇌전증과 함께 사망하였지만 점차 사회화되며 정서적 증세가 완화되었다는 기록이 남는다. 이는 인권 보호 차원에서 미화되었다고도 하지만 실제 회사에서 해고된 후에도 다양한 곳에서 일을 한다. 점차적인 사회화가 진행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위의 주장만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변화는 설명할 수 없다.

 뇌는 한 부분이 다치면 다른 영역으로 가지를 뻗기 시작한다. 그래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손상 부위의 역할을 다른 곳과의 연결을 통해 회복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를 뇌의 가소성이라 한다. 당시의 의학으로는 뇌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정설이었지만 이를 깨고 뇌는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많은 것이 바뀌게 된다. 그래서 뇌의 분할과 특정 기능을 담당한다는 주장에 덧붙여 손상받은 부분의 기능이 다른 곳으로 넘어간다는 주장이 합쳐져야 머리가 관통된 청년을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뇌출혈이나 사고로 뇌를 다치면 치료를 받으러 오신다. 많은 환자에게서 공격적인 성향을 발견할 수 있는데, 공통적으로 보호자에게 듣게 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전에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어요.”

 변해버린 성격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다. 쉽게 화내고 공격한다. 자신의 뜻과 맞지 않다면 그 누구라도 때린다. 덕분에 치료 시간에 환자에게 맞는 일이 대다수이다. 가끔은 나도 사람이다 보니 울컥할 때도 있지만 환자니까, 아프니까 하는 이유로 웃어넘긴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환자는 이해받지 못했던 시대를 살아가던 피니어스 게이지가 아닌 많은 것이 밝혀진 현대를 살아가는 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왕왕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어투로 사람답게 좀 살라고 이야기한다.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사람답다’의 정의를 내릴 수 있는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사람답기 위한 행동 양식을 말할 때 떠오르는 상각들이 있을 것이다.

 동물과는 다르게 언어를 쓰고 관계를 맺는다. 감정을 공유하면서도 도덕과 윤리의 선을 지킨다. 사회적 관계망을 통해 문명과 기술을 발달시킨다. 공동체를 이룬 덕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회학,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파생된다. ‘사람답다’는 것은 이처럼 세상과 다양한 연결점 속에서 생겨나는 공통적으로 합의된 생활양식이다. 이를 지키지 못했을 때 사람답지 못하다는 오명을 남기고는 한다.


 그렇다면 아픈 사람들에게 동일한 기준으로 사람다움에 대한 기준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내가 보는 많은 환자들은 일반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있다. 전두엽이 기능을 못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을뿐더러 규범도 도덕도 필요 없다는 듯 내키는 데로 행동한다. 아니 식물인간에 가깝게 행동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도 많다. 이럴 때 우리는 이들을 사람답게 산다고 정의해야 할까? 아니면 아니라 이야기해야 할까.


 환자나 보호자가 나에게 와서 묻는다.

“이렇게까지 살아야 할까요? 사람답게 살지도 못하는 이 삶이 의미가 있을까요?”

 건네진 말에 보통의 위로를 전하지만 솔직한 나의 대답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르기 때문에. 앞으로도 꾸준히 들어야 할 질문이지만 평생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 지금까지의 연구로 많은 것이 밝혀졌지만 더 많은 고민을 남겨버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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