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벤쿠버를 떠날 마음의 준비가 되질 않았다. 벤쿠버로 오는 비행기를 탔던 날 아침, 처음 도착해 설레던 기분, 그때의 공기와 날씨, 바람까지도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하지만 사람들은 나의 마음을 모른 채 “밥 먹었니?” 인사하듯 “이제 짐 정리 시작했니?” 하고 묻기 시작했다.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먼저 알아채고 알려주는, 짐 정리할 시간이 된 것이다.
벤쿠버의 집값은 상상 이상으로 비싸다. 캐나다에서 가장 비싸고, 북미 전체로 봐도 10위 안에 들 정도다. 집값도, 생활비도 비싸고, 게다가 환율까지 올라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이 벤쿠버에서 아껴 살아야 했지만, 인생에서 처음 주어진 여유의 시간이었기에 줄어들다 못해 마이너스로 향하는 잔고는 생각하지 않고, 사고 싶은 것을 사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본 2년이었다. 그래서 집은 한국보다 두 배 작아졌지만, 짐은 두 배 이상 늘었다. 작은 팬트리에 발 디딜 틈 없이 놓여 있는 골프 클럽 세트, 골프 카트, 스키, 패들보드를 보니 우리가 여름과 겨울, 호수와 골프장, 스키장을 얼마나 열심히 누비며 신나게 지냈는지 알 수 있다. 아마 한국에 돌아가면, 그 순간의 느낌과 바람, 날씨, 공기를 그리워하게 되겠지…
1. 텐트 정리
한 번 더 캠핑을 갈까 싶어 처분하지 못했던 텐트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텐트에 침낭, 캠핑의자, 에어메트리스, 에어펌프, 자동차 컨버터, 타프까지 한 번에 올렸다. 한인 중고채팅방에 글을 올리자 2분도 안 되어 답장이 왔다. 주소를 알려주었더니 한참 답이 없다가, 마지막 메시지로 “비 오는 날엔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답장을 해줬지만 “비 오는 날은 적절하지 않을 것 같아 패스할게요”란다. 그러세요...
이어 크레이그리스트에 올렸고, 두 번째 연락 온 사람은 약속을 잡았지만 “보트를 잃어버려서 못 온다”는 연락. 세 번째 연락 온 사람이 결국 텐트를 사 갔다. 오늘 내가 판 텐트로 오늘 바로!캠핑을 간다는 화끈한 사람이었다. 픽업할 때 가져온 차를 보니 여기저기 부딪혀 있었지만, 수리하지 않고 테이프로 대충 붙여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런 당신이라면 비가 와도 캠핑은 거뜬히 하실 것 같아요. 굿 럭!
2. 옷 정리
정리하기 제일 좋은 시간은, 마음이 복잡하고,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고, 외롭고 짜증날 때. 즉, 남편과 싸웠을 때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갈 때 입었던 겨울 코트, 벤쿠버에 처음 왔을 때 가족사진 속 내가 입었던 스커트, 파스텔톤의 포근한 겨울 니트도 가차 없이 정리할 옷을 담은 큰 비닐 안으로 들어간다.
이런 날엔, 주변 사람을 떠올리며 “누구에게 어울릴까? 관심 있을까?” 묻는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사람은 어차피 혼자다. “나나 잘하자”는 생각으로 봉투 여러 개를 가득 채워 헌옷 수거함으로 향한다. 두 손으로 들 수 없어 골프 카트에 비닐을 실어 끌고 가는 내 모습이 웃기다. 옷 정리로 비워진 공간만큼 마음이 아직 시원해진 것은 아니다.
3. 사진 정리
그걸 왜 찍어? 나도 모르겠다. 이렇게 소소하고 하찮은 것들을 왜 그렇게 찍는지. 그렇게 남들은 찍지 않는 것들을 계속 찍다 보니, 사진 용량은 점점 차올랐고, 이제는 동영상은 8분만 찍을 수 있다고, 사진은 300장만 찍을 수 있다고 알림 메시지가 뜨기 시작했다. 2022년에 산 휴대폰이니, 그럴 법도 하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사진을 지우기 시작했다.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는 스크린샷 폴더를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해봐야지’ 했던 요리 레시피와 ‘가봐야지’ 했던 레스토랑들이 잔뜩 쌓여 있다. 오, 더 늦기 전에 해야겠다.
최근 사진부터 보면 벤쿠버에서의 일상이, 예전 사진부터 보면 한국에서의 일상이 보인다. 사진을 지우다 보면, 그래도 나, 좋은 곳 잘 다니고 좋은 사람들 만나며 잘 지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벤쿠버에서의 시간이 꿈결 같아서 돌아가는 날이 느리게 오면 좋겠지만, 한국에도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응원하고 위로해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과 함께한 사진들이 가득하다.
사진을 지우기 위해 사진첩을 보다가 오히려 행복한 순간들을 다시 되새긴 사진 정리. 나는 어디서든 행복할 것이다. 벤쿠버가 아니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