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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걸을까? 산책

by 메이

책을 한창 읽던 시절, 여자들의 등산일기라는 책을 읽었다. 각기 다른 주인공이 직장동료, 관계가 끊어진 가족, 새롭게 시작하는 연인 등 주변 사람과 함께 등산을 하는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책이었다. 책장을 덮고 나서 문득, 나도 운동을 함께하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내향적인 편인 나는 함께 하는 것보다 혼자 하는 것이 더 편하고 익숙하지만, 함께 운동을 함께 한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좀 더 즐거울 것 같았다. 그래서 나와 취향이 잘 맞다고 은밀하게 생각해 왔던 이웃분께 일주일에 한 번씩 같이 걷자고 제안했고, 흔쾌히 응해주셨다. 그리하여 겨울에서 초여름까지, 우리는 일요일 아침마다 만나 함께 걷곤 했다.


동네 공원, 조금 떨어진 공원, 아파트 단지 사이 오솔길, 야산 산책로까지—걸어서 갈 수 있는 모든 곳이 우리의 목적지가 되었고, 걷고 나서는 근처에서 커피를 마시고 그동안 읽었던 책 이야기를 하고 혼자서 일기 쓰는 시간을 가졌다가 다시 걸어서 돌아오곤 했다. 신기한 일이다. 사람과 있는 것이 에너지가 많이 소진되는 편이라 먼저 만나자고 잘 하지않는 내가 이웃님과 산책하는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누구 엄마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되는 시간이었고, 푸른 것들을 눈에 담는 휴식시간이었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시절의 일요산책은 여전히 산뜻하고 맑은 느낌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웃님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일요산책은 끝나게 되었고, 혼자라도 걸어야지, 했던 나의 다짐도 흐지부지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 밴쿠버에서 일요산책 대신 아침산책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이 하이킹을 자주 다닌다는 것을 알고서는 누구보다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던 Emily, 가장 좋아하는 운동이 무엇이냐는 나의 물음에 하이킹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고는 나는 그녀가 걷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름휴가에는 친구들과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예정이란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만나 안부인사만 나누던 Emily에게 용기를 내서 함께 산책을 하자고 말해보았다.


"시간 돼? 잠깐 걸을까?" 먼저 제안한 것은 나였을 것이다. 고민고민하다 건넨 그 제안에 Emily가 흔쾌히 받아주었고, 어느새 우리에겐 부담없이 물어보고 응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일상이 되었다. 책을 하며 나의 산책 친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더 가까워진 것도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나는 진지한 편이라 누군가를 웃기는 일이 어렵고 오히려 재미있는 이야기도 내가 해서 재미없다는 핀잔도 자주 듣곤 한다. 그런데 Emily는 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어주고, 진심으로 웃어주는 사람이다. 밴쿠버에서 같이 산책할 친구가 생기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을 이뤄준, 고마운 사람.



바다와 가까운 동네에 살아본 적이 없는 나에게, 매일 걸어서 바다를 보러 갈 수 있다는 건 여전히 신기하고 낯선 일이다. 예전엔 차를 오래 타고서야 겨우 만날 수 있었던 바닷가 풍경이 이제는 일상이 되었고, 아침산책으로 이 아름다운 일상을 더 가깝게 느끼게 되었다. 멀리 보이는 다운타운은 여기와는 다르게 분주하고 치열한 분위기겠지만 내가 걷는 이 길은 평화롭고 상쾌하다. 아침마다 이렇게 걸어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진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예전 동네를 함께 걷던 이웃님도 지금 밴쿠버에서 산책을 함께하는 Emily도 곁에 없으니. 다시 혼자 걷거나, 마음이 맞는 새로운 사람을 천천히 찾아야 할 것이다. 함께 걸으며 나눴던 이야기들, 계절 따라 바뀌던 풍경들, 그 모든 순간들이 서로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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