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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다보면 끝도 있겠지.10K 마라톤

by 메이


끊어놓은 비행기 표가 있으면 여행을 떠나게 되고, 예약해 둔 콘서트가 있으면 음악을 듣게 된다. 미리 신청해 둔 마라톤 대회가 있어 10킬로미터를 달리고 왔다. 4만 명 정도가 참여하는 Vancouver Sun 마라톤이었다.

대회를 앞두고 매주 10k씩 꾸준히 달렸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연습을 중단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대회 2주 전 하와이에서 스노클링을 하다 산호초에 발바닥이 찢어지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상처는 길고 깊어서 가장 큰 크기의 밴드를 붙여야 할 정도. 걷는 것조차 힘들어 상처 부위가 땅에 닿지 않게 발가락을 오므린 채 걸어야 했다. 그래도 그날 아침, 하와이 바닷가를 5킬로미터 달린 후 발을 다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일요일 아침을 밴쿠버 다운타운에서 보내는 것은 처음이다. 달리다 보면 땀이 나서 재킷도 긴팔 티셔츠도 거추장스러워진다는 걸 알기에, 반팔과 반바지 차림으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대회 시작을 기다렸다. 조금이라도 햇빛이 드는 곳을 찾아 이동하고, 사람들 틈에 끼어 바람을 피하려 애썼다. "20분 뒤에 여러분의 밴쿠버 마라톤이 시작됩니다...", "10분 뒤에...", "5분..." 그리고 마침내 9시,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다른 사람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내게 편한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질주해 나가는 사람들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오버페이스를 하게 됐다. 1k를 지난 지점을 보니 기록은 5분 35초. 평소 6분 30초에 달리던 나에 비해 훨씬 빠른 속도였다. 역시나 처음에 5분대 속도로 달린 것이 무리가 되었나 보다. 평소에는 5k까지는 별 무리 없이 달리는데, 3k도 채 달리지 못했는데 두 번이나 쉬었고,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옆구리 통증까지 찾아왔다. 10킬로미터의 거리가 아득하게 느껴지는 오늘의 마라톤. 더는 걷지 않고 뛰어야 할 텐데, 다리는 점점 무거워질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다. 대회가 끝난 후, 꼭 메달을 손에 쥐고 목에 걸고 싶다. 완주한 사람에게 주는 피니셔 메달. 내게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밴쿠버 생활의 기념품이 될 것이다. 메달을 떠올리며, 플레이리스트에 담아둔 걸그룹 노래를 들으며, 거리 응원을 나온 사람들의 응원을 들으며 다시 뛰기 시작했다. 숨이 차서 또 걷게 될지도 모르지만, 일단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55분, 1시간대 페이스메이커를 따라 기록을 내겠다는 목표는 이미 흐릿해졌지만, 이제는 저기 보이는 신호등까지만, 그리고 그다음 보이는 나뭇가지까지만, 공원까지만, 그렇게 하나하나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이정표 삼아 천천히 나아갔다.

시작이 있다면 끝도 있다. 멀게만 느껴지던 10킬로미터의 도착점이 눈앞에 보인다. 평범한 거리에 세워진 finish line 풍선 하나가 지금 세상에서 가장 도착하고 싶은 곳이 되었다. 나도 마침내, 1시간 3분 35초 만에 도착했다.

사실 출발점에 섰던 순간보다 메달을 받을 순간을 더 기다려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봐도 메달을 주는 곳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Ask Me’ 팻말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물어봤다. "제 소중한 메달은 어디서 받을 수 있나요?" "카테고리별 상위 3명에게만 주는 거라, 대부분은 받지 못해요." 메달이 없는 마라톤 대회라니. 메달이 없다는 걸 알았다면 신청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지나버린 일. 나눠주는 주스 세 잔과 손바닥보다 작은 빵 두 개를 우적우적 먹고 자리를 나섰다. 메달까지 있었다면 완벽했을 텐데, 못내 아쉬운 마음이 남았다.

하루가 지난후 생각하니 달리기하며 힘들었던 기억보다 도착점 직전에 힘을 다해 달리던 그 순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어쩌면 그 순간의 기쁨 때문에 달리기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 발로 뛰어 땀흘려 도착할 수 있는 지점.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 쉽지 않았지만 해냈다는 성취감까지. 그래서. 내년에도 달리기를 하고 싶다. 그땐 벤쿠버가 아니라 한국 어딘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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