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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리 Nov 08. 2024

36. 순서가 문제야

가장 아름다운 쇼핑몰이라 불리는 퀸빅토리아 빌딩은 유리로 된 둥근 천장과 양쪽의 커다란 시계가 인상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가운데 시계는 현실과 동떨어진 시간 속에 스스로 멈춤을 택한 것인지 고장이 난 건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특별한 목적도 없이 쇼핑몰을 둘러보는 건 역시나 별로였다. 비로 인해 습도와 사람들이 가득한 이곳을 모두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주는 우리나라 쇼핑몰이 참 좋았구나 이제 그만 나갈까 하는 순간 't2' 매장을 발견했다. 순간 나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몇 안 되는 쇼핑목록에 담겨있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최근 차에 조금씩 관심이 생기고 있었는데 귀여운 틴케이스에 담긴 t2의 제품을 보곤 구매욕구가 치솟았다. 얼핏 봐도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종류가 많았는데 케이스 디자인도 다 달라서 더욱 고민스러웠다. 한참을 고민하고 있으니 입구 쪽에 기다리는 남자들의 눈치가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예쁘게 포장된 수면을 도와준다는 차세트와 인기 많다는 복숭아티를 재빨리 구매했다. 추가할인도 해준다는 말에 회원가입도 했는데 언제 다시 사러 갈 수 있을까?


다들 젖은 상태여서 옷도 갈아입을 겸 일단 숙소로 돌아갔다.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14시가 지나면 비가 그친다고 되어 있었다. 요 며칠의 경험 상 예보의 정확도는 생각보다 높았기에 믿고 예정대로 갭파크와 본다이비치를 가기로 했다. 페리를 타고 먼저 왓슨스 베이로 이동을 해야 하기에 짐을 챙겨 서큘러키로 향했다. 서큘러키 앞은 이름이 알려진 식당들도 많았는데 우리는 그중 수제버거 맛집으로 유명한 '베티스 버거'에서 점심을 먹었다. 버거는 무난했고 예상외로 어니언링이 맛있어서 추가주문까지 해서 먹었다. 맛보고 싶었던 메뉴 하나를 또 지울 수 있었다.


멜버른에서는 트램 타는 재미가 있었다면 시드니에서는 페리를 타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동하는 동안 비는 여전히 내렸지만 저 멀리서부터 점점 해가 비추는 걸 볼 수 있었다. 왓슨스 베이에 내려 조금 걸어 올라가면 바로 갭파크가 보인다. 영화 '빠삐용'의 마지막 장면에 나온 곳이라는데 영화를 보지 않아서 별 감흥은 없었다. 분명 멋진 풍경인데 그레이트 오션로드를 다녀와서인지 아담해 보였다. 절벽아래에서 자전거를 발견했다. 블루마운틴에서는 자동차였는데 여기서는 자전거라니 이런 걸 찾아내는 우리 가족은 좀 특이한 것 같다.

다시 버스를 타고 시드니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본다이비치로 향했다. 구불구불 길을 따라 위로 아래로 움직이는 현란한 버스기사의 운전솜씨에 2번이 살짝 멀미가 올 것 같다고 했다.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구름이 가득했다. 본다이비치에 도착했는데 다들 뜨뜻미지근한 반응이다. 골드코스트 해변을 실컷 보고 와서 그런지 여기는 그냥 좀 큰 해변일 뿐이었다. 캡파크도 본다이 비치도 분명 멋진 곳이 분명한데 아무래도 여행 순서가 문제였던 것 같다. 그래도 맨발로 보드라운 모래사장을 거니는 건 좋았다. 신발을 가방에 달고 파도랑 장난치듯 해변 산책을 했다. 비가 와서 그런지 피부에 닿는 물이 차가웠고 명성에 비해 해변은 한산했다. 흐린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보드를 들고 바다로 향하는 소년들을 보며 남편은 자기도 저 아이들처럼 매일 타면 잘 탈 수 있을 거라며 아쉬워했다. 수영도 못하는 사람이 서핑이 어지간히 재미있었나 보다. 여기까지 온 김에 다들 인생사진 남긴다는 아이스버그 수영장도 슬쩍 보았다. 실제로 수영하는 사람은 몇 없고 다들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온 아이들은 바로 호텔 수영장으로 향했다. 흐린 날씨에 본다이비치에서 마음껏 놀지 못한 아쉬움을 이곳에서 달래기로 했다. 61층에 위치한 수영장에서 하버브리지가 보였다. 하늘에 떠 있는 수영장이라 생각하니 뭔가 기분이 색달랐다. 왠지 모르지만 이번에도 수영장에는 우리 가족밖에 없었다. 신나게 즐겼다.

오늘도 아이들은 외식을 거절했다. 또 고기를 굽고 토마토소스 스파게티를 해서 저녁을 해 먹였다. 이쯤 되니 여행이 아니라 호주 주방 체험을 하러 온 게 확실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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