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장편소설] 페르소나 논 그라타 2부 -12-

무속인은 여인에게 열심히 신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by proofs

10

승민은 점심을 먹고 연주실로 향했다. 기타를 치고 싶었다. 3학년 선배 한 명이 가끔 오기는 하지만 동아리는 승민과 다른 2학년이 주축이다. 자율동아리 신고와 활동을 신청하면 수업이 끝난 후 동아리 연습실을 사용할 수 있다. 도서관 건물 지하 구석에서 기타를 만졌다. 왠지 모를 흥분이 느껴졌다. 오늘은 연주가 잘 풀리는 느낌이다. 클래식 음악연구부라는 거창한 자율동아리였지만 사실은 밴드에 관심이 있는 서너 명이 모여서 기타 연주를 연습하는 부서와 다름 없었다. 금요일 오후 마지막 수업이 끝난 후 이들은 동영상을 돌려보며 지미 핸드릭스 오지 오스본, 에릭 크랩튼의 영상을 보고 연주법을 익히고 도움을 주고 받았다. 승민은 연주를 하며 아무래도 자신은 음악에 재능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연주는 유명 연주자를 흉내 내기에도 벅찼다. 사실 연주는 스트레스 해소 목적도 있었다. 무엇인가 몰입할 것을 찾아야 했다. 금요일 오후에는 조금 더 늦게까지 연주연습을 할 수 있다. 토요일도 연습실을 이용할 수는 있었지만 허락을 받아야 했다. 이번 주는 토요일 연주실 사용 신청을 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다른 두 명이 나타나지 않았다.


연주실이라고 해봐야 철거 예정인 장서관 계단 밑 반지하의 공간에 불과하다. 창고같은 곳이다. 계단에는 먼지와 쓰레기가 나뒹굴었다. 오래전 누군가 소음방지용 스펀지를 내부에 덕지덕지 붙여 놓았다. 승민과 기타부원들은 가끔 몰래 학교에서 쓰는 행사용 앰프를 가지고 올 때도 있었다. 들키면 크게 혼날 것이라고 생각해 가끔 기회를 봐 실행에 옮겼다. 승민은 그날 이상하게 연주에 힘이 들어갔다. 스스로에게 만족을 주기 위한 연주이기는 했지만 기타리프를 연주할 때 왠지 모를 떨림이 찾아왔다. 잘 잡히지 않던 코드가 오늘은 수월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연습이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일까? 일렉기타의 전자음을 엠프로 듣고 싶어졌다. 한동안 그 소리를 잊고 있었다. 부원중 한명이 ‘오늘 같이 연주연습을 못하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반이 달라지더니 같이 얘기할 시간도 없었다. 십 여분 후 오늘은 날이 아니라고 다른 멤버도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은 진짜 날이 아니군‘ 승민도 그렇게 생각하며 곧 자리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날 승민은 신기한 모습을 보았다.


11월 초 학교는 가장 평온한 시기다. 기말고사 까지 여유가 있고 선생들도 편하게 근무할 수 있다. 보직을 맡거나 학교 행사나 일정을 기획해야 하면 예외지만 말이다. 안승민은 황정우 쌤을 도와 구도서관 장서와 관리를 맡아 열쇄를 관리하고 있었지만 틈이 있었다. 도서관 뒤편 건물 유리문은 비번으로도 열 수 있다. 승민이 연주연습을 하는 공간은 구도서관 현관을 뒤로 돌아야 하는 지하 입구 쪽이었다. 꺼내온 엠프를 다시 가져다 놓아야 했다. 무단 비품 사용이 문제가 되면 시끄러울 것이다. 학교로 다시 돌아가면 9시쯤 된다. 반석동 근처에서 버스에서 내렸다. 반대 방향으로 버스를 타면 가까스로 9시 전 학교에 도착할 수 있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당직근무자를 만날 수 있기에 학교 뒤편 동산으로 이어진 곳으로 가 철망을 들어올렸다. 들어갈 수 있는 충분한 틈이 있었다. 몇 번 해 본적이 있기에 위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빨리 움직여야 한다. 다행이 아직 당직근무자가 순찰을 돌고 있지는 않은 듯 했다. 재빨리 그는 도서관으로 뛰어가 현관 비밀번호를 열었다. 오래전 황정우 쌤이 복사물을 가져다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장서실 비번을 알게 되었고 가끔 오래된 엠프를 몰래 사용할 수 있었다. 혹시 바뀌지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삐리릭 소리가 들렸다. 열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지하로 내려갔다. 앰프를 원위치에 옮겨 놓고 장서실을 나가려 했다. 그때 인기척이 들렸다. 당직근무자인 모양이었다.


‘아.. 이런 꼼짝없이 갇혔다.’

기다려야 한다. 승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기가 귀찮았다. 그는 숨어서 인기척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 어?

당직 근무자가 아니었다. 갑작스레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최영은 같았다. 이 시간에 여기는 왜? 그녀는 평상복 차림이었다. 어떻게 들어왔지? 문이 잠겼을 텐데. 출입비번을 알고 있나? 잠시 후 최영은은 소파에 앉아서 전화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후 황정우쌤이 들어왔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갑작스레 둘은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승민은 머리를 둔기로 맞은 듯 한 충격에 빠졌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어서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잠시 후 최영은이 장서실 밖으로 나가 뒷산으로 나가는 것 같았다. 승민은 이제야 여러 사건에 최영은이 중심에 있을 수 밖에 없는지 알 수 있었다. 이미현의 전학이나 삼악산 수련회 숙소에서 숨진 오주희 사건도 이해가 갔다. 이들이 학폭으로 오주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일 수도 있다. 왜 황정우가 오주희와 방을 바꿔줄 사람을 종례시간에 말했는지 여렴 풋이 알 것 같았다. 며칠간 승민은 멍하니 황정우와 최영은의 밀회를 떠올렸다. 답답한 마음에 비밀을 이야기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대체 누가 이 이야기를 믿을 것인가. 아이들에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소문만 부풀려질 뿐이다. 두렵기도 했다. 황정우와 윤영근 쌤을 중심으로 다른 선생들도 오주희 사건을 무마했다. 쓸 대 없는 소리를 하면 학교와 본인에게 도움이 될 것이 없으니 경찰조사에서도 알려준 대로만 진술하라고 아이들을 회유했다. 승민은 그 상황이 떠올랐다. 하지만 자신이 나선다고 해도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축제를 일주일 남기고 형주시내는 곳곳에 축제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승민은 평소와 같은 일상을 이어갔다. 최영은을 볼 때마다 장서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음악실에서 연습을 했고 가끔 동아리 담당선생에게 이야기해 방과 후 연습실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 무렵 승민은 정혜와의 사이가 좀 멀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버스에서 마주쳐도 승민이 말을 걸어도 정혜는 마지못해 대답하거나 못들은 척 하기도 했다. 승민은 답답했다. 정혜와 좀처럼 가까워질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행사 일주일을 남기고 마무리연습을 위해 점심시간과 방과 후 음악실을 찾았다. 학교 축제일은 며칠 남지 않았다. 잠시 연습을 하고 계단을 올라 장서실에 들렀다. 예상대로 둘은 열심히 책을 보고 있었다. 승민이 다가와 아는 척을 했다. 정혜는 슬쩍 그를 보더니 다시 책에 몰두 했다. 며칠 전 정혜가 버스에서 왜 아이들은 소진이를 저렇게 놔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승민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민소진의 아버지와 최영은 어머니가 불륜관계였다고 했다. 이후 최영은의 아버지가 사고로 사망했는데 민소진의 아버지와 다툼이 있었고 그 혐의로 기소돼 수감됐다고. 민소진의 아버지는 이후 새로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고 최영은의 어머니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 살고 있었는데 자살했다고 한다더라. 그런 이야기였다. 최영은은 그 때문에 할머니와 살고 있다고. 물론 자신이 직접 최영은이나 민소진에게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최영은은 그 이유로 민소진을 괴롭히고 다른 아이들도 어느 순간부터 그 상황을 방관하는 것 같다. 승민은 말을 계속했다.


― 나도 전학을 왔어. 저 둘의 어릴 적 일은 잘 몰라. 어릴 때 둘은 친했다고 하더라고. 하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 최영은은 피해자가 돼 민소진을 괴롭힌다는 것이지.

― 그렇구나. 직접 물어볼 기회가 없었는데. 대충 알겠어. 그런 일이 있었어. 하지만 그게 저렇게 소진이를 반 전체가 괴롭힐 이유가 돼? 최영은은 그렇다고 쳐도. 너희들은 모두 다 방관자 아냐? 비겁한 것 아니냐고.


승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정혜의 말이 맞다. 비겁한 방관자인 것은 분명하다. 대화 이후 정혜는 승민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형주시 축제 하루 전이었다. 시내는 오래간만에 사람들로 넘쳐났다. 금요일부터 토요일로 이어지는 11월 마지막 주 에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수업을 마치고 체육관에는 동아리들이 만든 부스가 차려지고 학급과 동아리단위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전시됐다. 오후 수업이 끝난 후 이제 동아리의 공연이 시작될 차례였다. 몇몇 팀들의 무용과 댄스 공연이 펼쳐졌고 아이들은 박수로 환호했다. 승민은 악기를 튜닝했다. 곧 팀원들과 함께 연주를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신중하게 감정을 실었다. 몇 번의 실수가 있었지만 베이스의 굵은 음색이 긴장을 털어내고 공기를 적셨다. 같은 반 아이들 몇 명이 환호소리를 내 주었다. 기타의 코드에 맞춰 공기의 음향과 파장이 공간에 울렸다. 준비가 됐다. 딥 퍼플의 <smoke on the water>, ac.dc<black in black>, <sweet childen o mine>를 준비했다. 멜로디가 좋고 익숙한 곡들이었다.


다른 후보 곡들도 있었지만 다양한 취향을 반영해 연습이 수월한 곡을 선정한 것이다. 엠프와 각종 기기들 세팅이 끝나고 연주 공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저 멀리 선생들도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서 있었다. 승민은 긴장감이 들었다. 베이스가 일단 시작을 알렸다. 고개를 끄덕이며 서서히 연주를 시작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긴장으로 음정을 놓치기 일 수 있었지만 조금씩 몰입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에는 자신을 보는 이들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리듬의 흐름에 온전히 빠져들었다. 사람들 앞에서 한 번도 공연과 연주를 한 경험이 없었지만 무대매너를 아는 것처럼 연주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놀랐다. 연주와 동시에 연습했던 노래를 조금씩 따라 부르기도 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사방이 조용했다. 다들 완성도 높은 연주를 들려줄 것 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멀리 보였던 몇 명의 선생들이 박수를 쳤다. 환호가 이어졌다.


연주공연을 들었다는 만족감을 주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승민은 곡을 연습하기 위해서 꾸준히 연습을 이어갔다. 그는 몇 가지를 알게 됐다. 무엇인가 하나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전력을 다해야한다는 것을. 그 경험은 <엔젤 메카닉스>를 성공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학교 축제와 승민의 연주는 성공리에 마무리되었다. 11월의 마지막 주말에 열리는 형주의 축제가 시작됐다. 방송사 카메라가 늘어서 있었고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지역단체장등의 인사말과 사람들의 환호가 들렸다. 아이들도 학교 수업이 끝난 후 시청주변의 도심지와 형주항 일대를 돌아보며 축제를 즐겼다. 이틀간 다양한 형태의 축제가 이뤄지고 저녁 8시 풍어를 비는 풍장굿이 벌어질 예정이었다. 승민은 아이들과 축제가 열리는 시내를 돌아보고 있었다. 야시장에서 먹거리를 사먹었고 공연장에는 흥겨운 소리가 넘쳐났다. 축제 때 맞춰 나타나는 노점들과 관광객들로 시내는 붐비고 있었다. 승민은 항구 쪽으로 향했다. 작년에 화려한 굿을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다른 아이들에게 굿이 참 재미있다고 말하면 아이들은 그의 취향을 신기하다는 듯 어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승민은 이번에도 항구로 향했다. 사람들이 몰려있었고 곧 시작될 모양이었다. 굿에 필요한 무구도 갖춰지고 있었다. 곧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들끓었다.


악사들의 연주가 펼쳐졌다. 악사와 굿을 도와주는 사람 가운데 눈에 익은 자신의 나이대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정혜였다. 정혜가 저기에? 정혜가 심부름 같은 잡일을 하는 듯 보였다. 혹시 정혜는 작년에도 악사를 했던가? 작년에도 굿은 한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다. 자세히 보니 무속인의 굿의 진행을 돕고 있는 듯 보였다. 정혜는 한복을 걸쳐 입고 무구를 열심히 나르고 있었다. 아니 대체 왜? 정혜가 저기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속인은 악사의 장단에 맞춰 굿을 시작했다. 풍어를 기원하는 제례였다. 무당은 방울과 부채를 흔들기 시작했다. 악사의 장단은 점점 고조됐다. 굿판에는 흥분과 긴장이 넘실되기 시작했고 굿을 보는 관중들도 덩달아 흥에 빠져들었다. 무당은 접신에 들린 것인지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무당이 모시는 신의 말인 공수를 사람들에게 전달할 차례였다. 잠시 후 무속인은 한 여인을 불러냈다. 무속인은 여인에게 열심히 신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정혜는 악사들 옆에서 굿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때 승민은 정혜와 눈이 마주쳤다.

keyword
이전 02화[장편소설]페르소나 논 그라타 2부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