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작은 '실격'이었다.
억울한 3수 도전기.
나의 시작은 긴장의 연속이었으나 찰나였으며, 지름길이었지만 막다른 길이기도 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까먹는 귤, 그리고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먹는 뜨끈한 어묵이 생각나는 그런 날이 있다. 살을 에는 추위와 칼바람이 부는 그런 날, 나는 혼자였다. 성인 남성 한 명이 겨우 앉아있을 수 있는 공간에서 그렇게 숨죽여 긴장하고 있는데, 갑자기 낯선 남자가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리세요!"
"네? 저, 아직 출발도 안 했는데요"
나는 그렇게 첫 번째 운전면허 기능시험에 실격했다.
이유도 모른 채, 차가운 1톤 트럭에서 내려야만 했다. 출발도 못해보고, 운전석 의자에 엉덩이의 따스한 기운이 채 감돌기도 전에 떨어진 이유라도 알아야만 했다. 안전요원에게 물어봤더니, '출발하십시오'라는 소리 못 들었냐는 짧은 한마디만 남기고 귀찮다는 듯 자리를 피했다. 안타깝지만 나는 기억이 없었고, 안전요원의 자비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2005년 1월의 겨울은 유독 더 추웠던 걸로 기억한다.
뒤돌아 이비인후과로 가려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운전면허 기능시험을 접수하러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차마 출발도 못했다는 말은 꺼내지 못하고, 운전면허를 따서 나중에 멋지게 드라이브를 시켜주겠다는 달콤한 말로 어머니에게 시험 접수비를 어렵게 지원받았다. 당시 어머니는 그 지원금이 비트코인만큼이나 잘못된 투자라는 걸 미처 알지 못하셨다.
3일 정도 지났을까. 당시 나는, 흡사 이순신 장군이 고작 13척의 배를 이끌고 명량대첩에 임했던 마음가짐으로 다시 기능시험장으로 향했다. 깔끔하게 귓밥까지 파내고. 모든 신경을 '출발하십시오'라는 소리에 집중시켜며 나의 두 번째 운전면허 기능시험이 시작됐다. 다행히도 이번엔 출발에 성공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 100점 중 50점은 먹고 들어가는 기쁨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인생이 늘 그렇듯, 선취점 50점의 기쁨은 5분을 채 넘기지 못했다. 출발은 경쾌하게 했지만, 출발선 바로 앞에서 마주한 언덕코스는 8,848m 에베레스트 산처럼 다가왔다. 일단, 배운 대로 언덕에서 3초 대기 후 출발하면 되는 코스다. 연습 때는 대기 후 출발 시에 반클러치를 하면 언덕을 가뿐히 넘어갔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출발하려고 반클러치를 하는 순간 시동이 꺼져버렸다.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고 했던가. 다시 시동을 걸고, 정신을 발끝으로 집중시켰다. 이제 하사불성만 남았는데, 하자가 생겼다. 반클러치에서 트럭이 뒤로 미끌리며, 다시 시동이 꺼진 것이다. 그 순간 미리 보는 병영체험 같았다. 말 그대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난, 다시 안전요원과 수줍게 짧은 만남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순간 안과로 가려다가 정신을 차리고, 또다시 운전면허 기능시험을 접수하러 갔다. 전화기 너머로 아버지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이순신 장군이 왜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버지 손에 끌려 면허시험장에 가는 조건으로 어렵게 접수를 마칠 수 있었다.
다시 3일 정도 지났을 무렵. 모든 것을 걸고 전력을 다해 타노스에게 맞서던 어벤져스처럼 비장하게 3번째 트럭에 올랐다. 귀를 열어 순조로운 출발 그리고 언덕코스를 엑셀로 사뿐히 지르밟고 올라섰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희열이었다. 욕심을 버렸고, 중간에 어쩌다가 5점도 버렸다. 후반부엔 T자 주차구간에서 과감히 선을 이탈하며 10점도 버렸다. 그렇게 비움으로써 85점이라는 점수가 보였다. 비로소 삼수 만에 운전면허 응시원서에 기능시험 합격이라는 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삼수 끝에 MBC 연예대상의 주인공이 된 박나래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그해 여름, 도로주행은 단 한 번에 합격했고 드디어 운전면허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이후에 운전을 하면서, 기능시험에서 겪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우여곡절을 겪을 수 있었다. 그리고 크게 두 부류의 운전자들을 볼 수 있었다. 이는 미국 유명 코미디언이었던 조지 칼린의 말로 대신하고 싶다.
"나보다 느리게 운전하는 사람은 전부 멍청이고, 나보다 빠르게 운전하는 사람은 전부 미친놈이다."
나의 시작은 실격이었고,
나의 운전은 인격이라는 걸 새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