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길에 듣는 노래
서울예술대학 출신으로 2008년 제19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한 음악인 홍혜림은 2012년 첫 앨범 <as a flower>를 발표했습니다. 이 앨범의 타이틀 노래는 ‘태양’인데 그보다 더 기억에 남는 노래가 바로 첫 트랙 ‘일상(A Day)’입니다.
자명종 울리고 부은 두 눈을 깜빡이며 곰곰이 생각을 한다 또 다른 오늘 수필집을 읽고 내일을 그리고 너를 그리워하며 안녕을 묻고 어제와 비슷한 우울한 기분을 느끼고 떨치고 다짐하고 나를 다독이고 거리 위로 내려앉는다 1~2년 전에도 했을 법한 생각을 하고 있을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 생각하며 하루 산다
현악기 연주와 홍혜림의 목소리만으로 이뤄진 2분 1초가량의 짧은 노래입니다. 보통 앨범에서 삽입곡 내지는 ‘프롤로그’ 성격의 노래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엄청난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심오한 노랫말을 품고 있지도 않으며, 엄청난 대중성과 훅을 지닌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이 노래를 듣자마자 또 사랑에 빠졌습니다. 처음에는 이유를 잘 모르겠더군요. 완급 조절이 뛰어난 현악기 연주와 음색이 좋은 홍혜림의 목소리 때문이었을까요. 그것들도 이유가 되겠지요. 하지만 그것 때문이라고 내세우려 하니 주저하게 됩니다.
그보다 좋았던 것은 노랫말 사이의 틈입니다. 자명종 울리는 소리에 일어난 화자가 겪는 일들을 담담하게 담아낸 노랫말이지요. 곰곰이 어떤 생각을 하고, 수필집을 읽다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우울함을 떨치려 자신을 다독이는 화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가장 좋아하는 노랫말은 마지막 문장입니다. “1~2년 전에도 했을 법한 생각을 하고 있을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 생각하며 하루 산다” 다들 그렇지 않나요? 저는 그렇거든요. 이번엔 잊어야지, 이젠 이렇게 다짐하고 1년이 지나면 저는 여전히 똑같은 생각을 하며 다짐하고 있더군요. 게다가 “있을 수 없는 일들”을 생각하는 것은 상상력을 지닌 인간의 특권 아니던가요.
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일을 다 겪을 수는 없습니다. 소설이나 영화 속 주인공이라면 작가나 연출가가 주인공에게 온갖 행운이나 불행을 몰아줄 수는 있겠죠.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그런 사람은 드뭅니다. 우린 대부분 얼마간의 행운과 불행, 고난과 희망의 교차 속에서 살아갑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할 수 있는 것도 있고, 하고 싶지도 못하는 것도 있고, 기회는 있지만 안 되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생각하고 상상하며 짜릿한 일탈을 맛봅니다. 세계 최고의 음악인이 됐다가, 세계 영화제를 휩쓰는 영화감독이 됐다가, 모든 여자가 따르는 장신의 인기남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저는 그중 그 무엇도 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상상은 그 모든 것을 이루게 해줍니다.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은 상상이 아닐지요.
전 홍혜림의 ‘일상’을 듣는 2분 동안 끊임없이 노래 틈 사이로 무언가를 집어넣고 있습니다. 오늘 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읽을까, 누구를 그리워하고, 우울한 기분은 어떻게 떨쳐낼까. 때로는 <이터널 선샤인>의 주인공처럼 일상을 탈출해 제주 바다를 향하고는 합니다. 전동차 안에서 눈을 감으면 전 이미 함덕과 한담산책로의 어딘가에 도착해 있습니다. 2분으로 너무 짧다면? 우리에게는 반복 재생이라는 좋은 기능이 있잖아요. 출퇴근길 내내 반복해서 들으며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그러고 나면 ‘홍혜림의 일상’은 ‘노윤영의 일상’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건 이제 제 노래가 되는 겁니다. 적어도 제 머릿속에서는 말입니다. 밋밋하고 뻔한 이야기지요? 그런데 어쩔 수 있나요?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제 일상은 틀에 짜여 있습니다. 저는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나는 순간 생계를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래도 좋은 것. 이 넓은 감옥 안에서 홍혜림의 ‘일상’을 들으며 꿈꿀 수 있다는 점입니다. 노랫말처럼 저는 1~2년 후에도 비슷한 생각, 있을 수 없는 일들을 떠올리며 하루를 살아갈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