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길에 듣는 노래
추억 속에서 살지 말라고들 합니다. 주변 많은 이가 제게 경고하는군요. 사람은 과거가 아닌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고. 과거의 추억에만 골몰하면 넌 결국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는 외톨이가 될 거라고 말이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입니다. 물론 제게 영광의 시절 같은 건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는 과거의 몇몇 일들이 그립습니다. 생각하면 쓰리고 아픕니다. 감정의 높낮이가 급격하게 변합니다. 웃고 있다가, 한두 시간 만에 기분은 땅에 떨어집니다. 그러다가도 금세 우울해져 인터넷으로 ‘고통 없이 죽는 방법’ 같은 걸 검색해봅니다. 저는 제가 자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저처럼 죽음을, 내가 정지되는 순간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하지만 현실이 고통스러울 때마다 언제나 죽고 싶은 마음을 찾습니다. 그 마음은 제게 구실 좋은 도피처가 돼줍니다.
맑은 하늘의 푸름은 잊히지 않는 파노라마/옅게 마르는 기억/수도꼭지 물로 적셔가/흔들리는 길모퉁이에서 바람과 네가 소리쳐/물가를 돌아보았어/사랑이 그곳에 있었어/눈 깜짝할 사이 눈동자 속/푸르게 불타오르고 손바닥에 남았어/설렘을 지울 수 없어/언젠가 닿을까/잘되든 망하든 사랑이야/네가 좋다고 말하며 기도해 어제보다 오늘보다 더/언젠가 닿을 때까지 아득히 계속되는 마음이여/어디론가 달려가고 싶어?/어른이 될 수 없을 거야/내일은 너를 만날 수 있을까?/여름에 기도를
‘일상을 아름답게 수놓는 음악’을 추구한다는 일본의 시티소울 밴드 펜트하우스(Penthouse)의 노래 ‘夏に願いを(여름에 소원을 빌다)’를 듣습니다. 청춘 애니메이션의 삽입곡을 연상시키는 이 경쾌한 곡을 듣고 있으면 10대나 20대 시절의 푸르른 여름날이 떠오릅니다. 노랫말을 어렵게 찾아 번역기를 돌렸습니다. 일본 노래의 노랫말은 우리 가요의 80~90년대가 그랬듯 시적인 감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최근 우리 가요들은 너무 직설적이기만 합니다. 사랑해, 키스해, 싫어, 울고 싶어, 몸매 좋은데? 한 번에 인식되는 게 좋은 것, 조금이라도 꼬아놓으면 대중가요에서 예술은 하지 말라고 조롱당하기 일쑤입니다.
번역기 어투라서 조금 어색하지만 노랫말의 문장들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화자는 한여름의 푸른 하늘을 보며 ‘옅게 말라가는 기억’을 떠올립니다.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있군요. ‘사랑이 그곳에’ 있었다고 하잖아요. 화자는 상대방에게 닿고 싶어 합니다. 그건 아직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어린 시절 첫사랑은 씁쓸한 맛이라고들 하지요. 겉으로 보기엔 예쁜 꽃이 씹어보면 무척 쓴 것처럼, 첫사랑은 그런 맛이라고 하죠. 화자의 사랑은 이루어질까요? 쉬울 것 같진 않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아직도 그는 불타오르고 있고, 그의 손바닥에는 설렘이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 닿을 수 있을까? 잘되든 망하든 사랑이야’라는 노랫말에 무릎을 탁 칩니다. 그렇지요. 이건 사랑이잖아요. 결과는 중요하지 않은 겁니다. 지금 화자에게는 그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겠다는 의지, 그리고 상대방에게 닿길 바라는 소망이 중요합니다.
누군가는 희망이 사람을 망가뜨린다고들 합니다. 헛된 희망 때문에 사람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다고요. 현실을 깨달아. 정신 차려, 이 친구야! 저도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봤어요. 하지만 진짜 그럴까요?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나요? 우리는 사는 내내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래 여자든, 어머니든, 애니메이션 캐릭터든, 비누든, 햄버거든 대상이 무엇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거예요. 중요한 건 그 무언가를 위해 온 마음을 쏟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 사랑, 언제가 닿을 수 있다는 소망이 있기에 전 오늘도 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푸르른 여름날은 이제 멀어져갑니다. 9월도 지나 10월이면 여름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지겠어요.
하지만 이렇든 저렇든, 저는 그 무언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살아 숨 쉴 수 있습니다. 언제 닿을지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저는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어딘가로 향하는 ‘과정’이니까요. 우린 모두 어딘가로 가고 있는 모험가입니다. 저도,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모험가는 걷고 뛰며 주변의 모든 것을 눈과 마음으로 담는다고 하지요? 저 또한 제 주변의 모든 것을 마음에 꾹꾹 눌러 담습니다.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