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쓰는 편지
어제는 사진 스튜디오에서 매거진 인터뷰 및 촬영이 있었어. 성수동에 있는 스튜디오라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아. 버스로 한 정거장 간 다음 800여 미터만 걸으면 도착하는 곳이지. 스튜디오는 오래된 목욕탕 건물에 자리 잡고 있어. 주변은 공장들로 빼곡하지.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런 곳을 ‘힙하다’고 하더라고. 옛 공간을 새롭게 리모델링한 것도 아니고, 마감이 안 된 천장은 약간 거칠어 보이지만 20~30대들은 오히려 그런 분위기에 열광하던걸. 오늘도 그랬어. 그 스튜디오를 처음 방문한 클라이언트는 “오! 힙하다!”라고 외치며 좋아했어. 레트로 열풍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내가 90년대 문화를 열거하면 옛날 사람 같은데, 20대 친구들이 열거하면 힙해 보인다고 하더군. 난 힙한 레트로 스타일이 아니라 그냥 옛날 사람 그 자체니까.
남의 이야기를 듣고 정리해서 원고로 풀어내는 게 내 업무 중 하나야. 인터뷰 대상은 다양하지만 최근에는 어느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뤘거나, 명성이 있는 인물을 주로 만나고 있어. 어제는 유재석 씨가 진행하는 토크쇼에 출연한 바 있는 유명 전시 도슨트를 만나고 왔어. 전시를 맡았다 하면 많은 관람객을 몰고 다니는 유명인이지. 말끔한 인상과 호감형 외모는 물론 적당한 템포로 차근차근 설득력 있게 이야기해주는 목소리가 정말 매혹적이야. 작가나 작품 관련한 일화를 흥미롭게 들려주며 전시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 스토리텔러, 이야기꾼인 셈이야. 인터뷰 질문지를 만들려고 다양한 자료를 살펴봤는데, 이 사람의 인생 자체가 한 편의 ‘스토리텔링’이더라고. 미술이 아닌 영상을 전공해서 영상 제작 회사까지 다니다가 퇴사했고, 미술관에서 스태프로 일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도슨트가 돼 현재에 이른 이야기가 흥미로웠어.
그 사람의 스토리 중 가장 흥미로웠던 건 그가 실은 사람들 앞에 서는 걸 두려워하는 성격이었다는 점이야. 그냥 떠는 정도가 아니라 수전증이 심해서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을 정도라고 해. 그러면 언제 심하게 떠느냐고 물어보니, 해설이나 강연 준비가 철저하지 않으면 그렇다는 거야. 그러니까 이 사람은 떨지 않기 위해, 그리고 전공하지 않은 분야에서 살아남기 위해 ‘완벽주의자’라는 말을 들을 만큼 철저히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지. 한 작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오래된 뉴스부터 최신 기사까지 하나하나 다 읽어보고, 관련 책과 논문까지 모두 섭렵해야만 비로소 안심할 수 있다는 거지. 보통 3개월의 시간이 걸린다고 해.
내가 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느끼며 공감했던 이유는 나 또한 심하게 떠는 성격이기 때문이야. 학창 시절부터 그랬던 것 같아. 아직도 기억 나는 게 하나 있어. 지방 4년제 대학(문예창작학과)의 합격 소식을 받은 나는 2년제 대학에 도전했어. 4년제 대학 등록 시기가 2년제 대학의 합격 발표보다 늦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어. 그곳은 문예창작뿐 아니라 방송연예, 연극, 실용음악 등 문화예술 전공자들에게는 더없이 유명한 대학이야.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 중 많은 수가 그곳에서 대학을 나왔더라고. 그 대학은 수학능력시험 점수는 보지 않는 대신 내신 성적과 실기 시험으로 합격자를 골랐어. 실기 시험을 보러 갔을 때를 잊을 수가 없어. 드디어 주제가 공개되고 커다란 갱지에다가 분량 제한 없이 글을 써보라고 했어. 펜을 집어 들고 쓰려고 하는데 손이 너무 떨리는 거야. 억지로 써보려고 했지만, 글자가 삐뚤빼뚤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어. 나도 헷갈릴 정도였으니까. 망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지.
사람들 앞에 나선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군. 누군지 모르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서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말한다는 건 참 어려워. 그러니까 그 도슨트가 대단하게 느껴진 거야. 그걸 극복해낼 만큼 준비했다는 거고, 그만큼 그 일을 원했다는 거잖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설령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해도 그걸 남들도 인정할 수 있을 만큼 잘한다는 건 더욱 어렵고 말이지. 자신의 한계를 넘는다는 것, 그래서 ‘또 다른 나’를 만났다는 게 존경스럽게 느껴졌어.
어쩌면 내가 이렇게 매일 편지를 쓰려고 했던 건(실제로 매일 쓰지는 못했지만) 그런 이유 때문인지도 몰라. 직장인이 남는 시간을 활용해 매일 일정 분량의 글을 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 그 시간에 놀고먹는다고 딱히 뭐라 하는 사람도 없잖아. 자기 전 내가 피곤한 몸과 마음을 이끌고 노트북 앞에 앉아 뭔가를 꾸준히 끄적였던 건 ‘또 다른 나’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아. 매일 쓰다 보면 뭔가 내게 변화가 생길 거라는,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그걸 ‘너’에게 보여주고 싶었어.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지만 매일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무언가 바뀔 수 있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거든.
그동안 내가 쓴 편지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니? 지루했다면 미안해. 편지는 여기서 마감하겠지만 너무 실망하지는 마. 내 글은 이제 시작이니까. 이제 11월이 됐으니 또 다른 글들을 써볼까 해. 이번에는 직접 내 두 발로 다니면서 일주일에 한 편씩 쓸 거야. 직접 보고 느끼고 맛본 이야기들을 건져 올릴 생각이야. 그동안 내 편지들을 읽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