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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yeong Oct 29. 2023

지금 사소한 일상이 전부야

매일 쓰는 편지 

1994년 시즌 1으로 시작해 2004년 시즌 10으로 마무리한 미국 드라마 <프렌즈>는 시시각각 터지는 유머와 로맨스, 캐릭터들의 매력으로 큰 인기를 끌었어. 세기의 드라마라고 칭하고 싶을 만큼 전 세계적인 인기였지. 난 여기서 특히 로스(데이빗 쉼머 역)를 좋아했던 것 같아. 박물관에 근무하는 엘리트지만 허당끼가 있고 마음이 여려서 매력적인 캐릭터였지. 명장면, 명대사가 많지만 내가 <프렌즈>에서 가장 기억 남는 건 스토리텔링과는 큰 연관이 없이 친구들끼리 사소하게 나누는 대화 장면이었어. 미국 뉴욕시 맨해튼은 워낙 집값이 비싼 곳이니 자리 잡지 못한 20대가 혼자 살기는 버겁지. 그래서 그들은 한데 뭉쳐 살았을 거야. 그러다 보니 이래저래 같이 피자를 먹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마음에 드는 이성이나 회사, 혹은 그 밖의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었지. 난 그게 참 좋았어. 사소한 것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면 나중에 늙어서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프렌즈>에 출연한 멤버들은 작품 덕분에 스타가 됐지만 모두가 행복했던 것 같지는 않아. 누군가는 방황했고, 다른 누군가는 더 이상 그때만큼의 인기를 얻지 못했어. ‘챈들러 빙’ 역할의 메튜 페리도 그랬던 모양이지. 약물과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했던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오늘 오전에 접했어. 나와는 상관없는 외국 배우의 죽음일 뿐인데 기분이 아주 이상했지. 꼭 한 시대가 저물어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기분이야. 이제 어떤 방식으로든 <프렌즈>의 멤버들은 모두 모일 수 없다는 거잖아. 함께 행복했던 시절은 이제 영원히 ‘추억’으로 남겨둬야 하잖아. 

 

<프렌즈>를 보며 웃고 울며 청춘을 보냈던 나의 시간도 떠올랐어. 사실 오늘 오전만 해도 난 기분이 정말 좋았거든. 뮤지션 토무(tomoo)의 노래 ‘Ginger’에 반했어. 말하듯 자연스럽고 경쾌하게 내뱉는 보컬 스타일도 좋고, 상큼한 멜로디도 귀에서 쉽게 잊히지 않았어. 하지만 가장 좋아했던 건 노랫말이야. 반려묘(이름이 ‘생강’이었던 모양이지?)에게 사랑을 바치는 귀여운 노랫말이 종일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잖아? 들어보면 알겠지만 사소한 내용이야. 내 사랑 반려묘를 케이지 안에 가두지 않을 것이며, 나와 영원히 행복하자는 말이지. 근데 그 사소한 노랫말을 경쾌한 리듬과 달콤한 멜로디에 담아내니 아주 특별하게 느껴지더라고. 지루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내 일상이 그 노래 덕분에 조금은 근사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그러던 와중에 접한 메튜 페리의 죽음은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지. 그의 죽음을 접한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더군.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네요.” 그래, 누구나 다 알고 있잖아.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말하는 우리도 언젠가 때가 되면 사라질 거야. 누구나 청춘을 관통한 뒤 늙어가다가 죽음을 맞이하니까. 그걸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영생을 꿈꾼 진시황도 마찬가지였잖니. 

 

그 소식을 접한 후 유튜브로 프렌즈 관련 영상을 찾았어. 그중에는 2021년 방영된 리유니온 영상도 있었어. 이제는 다들 주름살이 늘었고 피부는 처졌더군. 누군가는 백발이 됐고. 돈이나 명성으로도 시간을 이길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지.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어. 다들 과거의 영광에 매달려 있기보다는 현재의 삶에 충실한 모습이었거든. 예전보다 덜 유명할 수 있지만, 대신 그때보단 더 편안하고 안정된 얼굴 표정이 읽혔어. 그걸 보고 나니 나도 덩달아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 함께 행복했던 시절을 ‘추억’으로 남겨둬도 괜찮을 만큼 현재의 그들은 충분히 괜찮아 보였어. 

 

내게 필요한 건 그들처럼 현재의 행복이겠지. 지금 내가 낙엽을 밟고, 밥을 먹고, 높고 푸른 하늘을 보고, 비가 내리면 빗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들이 중요한 거잖아. ‘Ginger’라는 노래에서 화자가 반려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도 마찬가지야.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대단한 거야. 그 작은 이야기들이 결국 지금 그를 행복하게 해주잖아. 나에게도, 그리고 너에게도 그런 사소한 행복은 있을 거야. 아침에 일어나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이 따뜻하다고 느낄 때, 출근길에서 땅을 내딛는 발소리가 유난히 경쾌하게 느껴질 때, 힘들고 괴로운 일이 생길 때마다 마시는 커피 한 잔이나 맥주 한 잔도 그렇겠지. 거대한 계획이나 큰 목표에 널 가두진 마. 그게 계획대로 잘 되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너는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어. 아니, 이미 넌 행복해. 다만 네가 네 행복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야. 두 눈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봐. 그걸로도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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