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인 우연이 필연적 과정으로
10km 마라톤도 완주했겠다 이제는 나름 달리기에 자신감이 붙었다. 5km라는 거리는 나에게 마음을 먹고 나서야 달릴 수 있는 거리였지만, 지금은 가볍게 조깅하는 수준의 거리가 되었다. 자신감이 붙은 만큼 러닝 크루 정기 러닝에도 자주 나가게 되었다. 낯설었던 크루원들이 조금씩 익숙해졌고 매일 모이는 마포나들목의 한강 러닝 코스도 몸에 점점 익어갔다. 그러던 와중 러닝 모임장이 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혹시 저희 러닝크루 운영진으로 함께 하실래요?
2년 전쯤의 제안이라 러닝크루의 몸집이 점점 커지고 있을 때였다. 10명 소규모로 시작한 러닝 크루가 점점 사람이 많아져 50명 남짓이 된 시점에서 페이서와 모임을 진행해 줄 운영진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마침 정기적인 러닝으로 열정이 식어가는 와중에 적절한 연료라고 생각했다. 정기런 프로참석러로써 나에게 책임 의식을 부여해 줄 좋은 이벤트구나. 길지 않은 고민 후 "해보죠 뭐"라며 가볍게 제안을 받아들였다. 우발적으로 러닝 크루 운영진이 되는 순간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사실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지만 운영진이라고 생각하니 더 열심히 뛰어야 할 것 같고, 더 섬세하게 사람들과 이야기해야 할 것 같고, 동기부여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이 모임에 운영진으로서 기여를 한다는 느낌이라도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 스친 우발적인 생각은 '로고를 리뉴얼해 볼까?'였다. 이제 슬슬 사람도 많아질 텐데 시그니처한 로고를 만드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한 것이다.
'H'를 살린 디자인과 분홍색, 자랑할만한 디자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직접 만들었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었다. 사진을 찍을 때 활용할 시그니처 H 사인도 이 로고를 통해 더욱 공고해졌다.
운영진은 정기런/벙개런 모임을 통해 그룹별로 러닝 페이스를 이끄는 '페이서' 역할을 해야 한다. 1km 당 6분 정도의 페이스로 달리기로 했다면 6분에 맞추어 적절히 속도를 조절하고 그룹을 이끌어야 한다. 속도를 맞추기 위해선 힘들다고 속도가 떨어져서도 안되고 내가 힘이 난다고 해서 속도를 빠르게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달릴 때 페이스를 항상 체크하고 몸에 페이스가 익도록 5:30 / 6:00 정도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달리는 것을 몸에 익혔다. 혼자 뛴다면 처음엔 빠르게, 그리고 힘이 빠질 때 느리게 뛸 수도 있고, 인터벌로 훈련을 할 수도 있지만 나는 페이서로써의 러닝 연습을 추가로 하게 된 것이다. 이 훈련 덕분에 나중 마라톤에서도 내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기록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달간 기여를 위한 훈련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페이스 유지하며 달리기, 장거리 달리기 연습이 되었다. 우발적으로 맡은 역할 덕분에 결과적으로 '더 잘 달리는 사람'이 된 것이다. 만약 운영진은 부담스럽다고 피했다면 러닝에 싫증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발적인 운영진 가입이 러너로써의 성장에 필연적인 훈련 과정을 겪게 해 준 것이다. 다음엔 어떤 우연을 마주할지 기대하며 오늘도 러닝화 끈을 조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