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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스토리 Aug 23. 2020

몸은 여행 중, 정신은 한국에

가족이라는 무게

카카오톡이 생기면서 만들었던 우리 '네 자매' 단톡방이 있다. 한국을 떠나 왔지만 단톡방에서 한국에 대한 소식을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었고 가족의 대소사에도 늘 함께했다. 좋은 곳에 가면 사진을 찍어 보내고 다음에 가족과 같이 오기를 약속했다. 매일매일 단톡방으로 이야기를 하니 마치 자매들 넷이 다 같이 모여 여행하는 것 같았다. 자매들과 대화하며 위로받는 일도 있었지만 집에 무슨 일이 있다는 대화를 나눈 날에는 걱정이 걱정의 꼬리를 물어 잠을 자지 못하고 혼자서 계속 고민했다. 딱히 해결방법을 찾지도 못하고 도움이 되지도 않으면서...



내 탓이오, 내 성격 탓.


평소에 나는 심부름을 참 잘한다. '언니, 박스 좀 구해서 주소 보내줄 테니 택배 좀 보내줘'라는 부탁에 박스를 찾아 신문지나 뽁뽁이로 튼튼하게 포장해 택배를 보낸다. '언니, 이거 중고로 팔건대 이 사람 좀 만나서 팔아줘' 

들어주기 귀찮은 부탁도 어느새 난 중고거래를 하기 위해 커피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가족일이라면 내 일처럼 나서서 한다. 아마 그런 성격 탓에 나에게 더 부탁하는지도 모르겠다.


신혼여행 때였다. 유럽으로 간 신혼여행에 자매들은 주문이 많았다. 명품가방을 봐달라는 언니들, 지갑과 벨트를 봐달라는 동생. 말씀은 없으셨지만 챙겨드려야 할 부모님까지. 굳이 말을 들을 필요는 없다. 의무가 아니니까. 하지만 '나 가방 하나 살 건데 사진 찍어 보내봐'라고 던진 한 마디가 나에게는 수행해야 할 미션으로 다가왔다. 사진 한 장도 보내기 힘든 환경인데도 나는 언니들의 요구를 만족 시키키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시차 때문에 바로 답장이 오지 않는 상황에서 나는 선뜻 살 수가 없었고 OK 승인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결국, 아울렛 오픈 시간에 맞춰 간 나의 쇼핑 미션은 아웃렛이 문을 닫고서야 끝이 났다.

그 마저도 다음날, 가방 크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언니의 불평에 남편에게 다시 아울렛에 다녀오자고 고집을 부렸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왕 사는 거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것을 사다 주고 싶었다. 아무래도 칭찬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내장되어 있나 보다. 시키면 다 하는 성격, 노예근성... 이런 답답한 성격. 그리고 이런 성격은 여행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언니의 이혼


세계여행을 떠난 지 3개월이 지났을 무렵, 한참 베트남을 여행 중이었다. 언니가 이혼을 한다는 소식을 접한 건 베트남의 퐁냐케방 동굴 투어 중 카카오톡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투어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자매애가 넘치고 원래 없던 걱정도 만들어하는 성격인 나에게 언니의 이혼은 마치 나의 이혼처럼 느껴졌다. 여행하는 매 순간순간 마음이 불편했다. 지금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 언니를 보듬어 주고 도와주고 싶었다. 조카들을 돌봐줘야 한다는 책임감도 밀려왔다. 지금 일생일대의 위기에 놓인 언니를 두고 한가하게 경치나 감상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또 언니의 이혼 소식으로 엄마가 걱정이 돼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쓰러지기 직전이며 회사에서 계속 실수를 해서 잘리기 일보직전이라는 소식은 원래 마음 붙이지 못했던 여행에 더욱 불을 지폈다. 그날은 엄마와 통화하기 위해 새벽 6시까지 잠에 들지 못하고 기다렸다가 한국 시차에 맞춰 엄마와 통화를 한 후에야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렇게 난 여행 중에도 가족이 우선이었고, 여행은 뒷전이었다. 그 사이 가장 힘들었을 사람은 남편이다. 여행을 즐기지 못하는 아내, 걱정해도 해결되지 않는 일로 감정 소비하며 끙끙 앓는 아내를 보고 있어야 하는 상대방은 오죽 답답할까... 하지만 그때는 내 가족 걱정을 하느라 남편을 보지 못했다.




보잉 737안에서


사람은 죽는 순간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장면들이 빠르게 보인다고들 한다.


콜롬비아에서 에콰도르로 넘어가는 비행기 안.

무심코 펼쳐보았던 비행기 안내 책자를 보고 온 몸에 소름이 돋고 미친 듯 심장이 뛰었다. 'BOING 737'

마치 이 비행기가 추락이 예정되기라도 한 듯 불안해졌다. 난기류 때문인지 유독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려 더 불안했던 것 같다. 남편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하는 나에게 '이미 많이 탔는데 네가 모르고 있었던 거야' 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그전에는 몰랐으니 모르고 넘어간 것이고 이번엔, 이렇게 내가 알고 있지 않은가. 이미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생각'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비행기 안에서 메모장을 열어 유서를 써 내려갔다.


유서를 쓰려니 지난날의 나를 돌이켜 보게 되었다. 엉망진창이었다.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세계여행 중인데, 어쩌면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 세계여행을 나는 최선을 다해 즐기지 못하고 돌아가지도 못하는 상황에 돌아갈 날만 꿈꾸며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여행이 끝나면 나는 엄청난 후회를 하게 될 것 같았다.

단 하루도 걱정 없이 즐긴 날이 없었다. 내가 걱정해도 해결되지 않을 일들로 걱정하며 정작 내 옆에 있는 사람과 소중한 추억은 쌓지 못했다. 그제야 나 때문에 여행을 망치고 있는 남편이 보였다. 세상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누구보다 소중한 내 사람. 내 남편.


비행기는 무사히 에콰도르 땅에 닿았다. 그리고 착륙 후 나는 남은 시간 남편과의 소중한 시간을 만드는데 집중하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네 자매 단톡방을 나왔다.


여행이 3개월 남은 시점이었다.





너무 늦게 알았다.
 그래도 끝나기 전에 알아서 다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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