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량 패딩으로 극한 추위와 싸우기
조지아에서의 한 달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딱히 하는 것 없이 잘 먹고 잘 쉬었다. 한 달이라는 넉넉한 시간이 있다 보니 다음에, 다음에 하며 미루고 게으른 한 달을 보냈다. 바빴던 여행 중 가장 느리게 여행한 조지아. 그래서인지 여유롭고 편안했던 여행지.
우리는 한 달 살기 25일째에 큰 마음을 먹고 숙소를 떠나 2박 3일로 카즈베기를 다녀오기로 했다.
첫 동행
카즈베기를 가기 위해 디두베역에서 합승택시를 탔다. 영상 촬영을 위해 앞자리에 타고 싶었지만 이미 먼저 온 사람들로 차 있었고 흥정을 통해 조금 저렴한 가격에 타는 걸로 만족하고 택시에 올라탔다. 맨 앞자리에 앉은 사람은 선글라스를 끼고 빨간 점퍼를 입은 남자였는데, 한국어를 하는 우리를 의식하는 걸 보면 한국인 아님 중국인이 확실했다. 우리가 차에 타자 '안녕하세요'라는 정다운 한국어가 들려왔다. 혼자 여행 중이라는 그 어린 친구는 맨 뒤에 앉은 우리와는 별다른 소통 없이 가다 카즈베기에 도착하자 조용히 모습을 감췄다.
여행을 하다 보니 느낀 것이 있는데 단기 여행자, 그러니까 짧게 여행을 온 사람들은 외국에서 한국인을 만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한국인이 많은 곳을 피하고, 지나가다 서로 만나면 서로 의식하며 불편해한다.
그러나 장기 여행자가 되면 지나가다 우연히 한국인을 보면 반가워한다. 먼저 말을 걸고, 인사를 건네는 편이다. 그렇게 정리하고 본다면 그 남자는 단기 여행자라고 볼 수 있다. 별다른 대화 없이 고작 '안녕하세요'를 끝으로 살아졌으니까... 혼자 여행을 왔으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내심 서운했다. 숙소도 궁금했고 일정도 궁금했다. 늘 남편과 붙어 있어서 그런지 새로운 사람이 궁금했다.
카즈베기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 유명한 호텔로 향하던 중 길에서 빨간 점퍼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길에 서서 연락처를 받았다. 이렇게 다시 만난 건 인연 아닐까? 우린 빨간 점퍼를 우리 숙소에 초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호스텔에서 몇 시간의 대화를 나누고 그 인연이 다시 또 이어져 앞으로의 여행에 함께하게 된다.
누가 알았을까.
빨간 점퍼 남자와
아르메니아까지 함께 가
밤 새 포커를 칠 줄이야
첫 트레킹
편도 2시간 정도 걸린다는 '게르게티 삼위일체 성당' 가는 길.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성당으로 손꼽히는 이곳은 보통은 걸어서 올라가는 코스지만 우린 그럴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조지아의 겨울은 우리가 방문한 2월에 가장 깊은 겨울에 빠진다고 한다. 겨울에는 현지인들도 잘 가지 않는다는 2월의 카즈베기. 계속 내린 눈에 어디가 산이고 길인지 제대로 구분할 수도 없었다. 차가 올라갈 수 없이 눈이 쌓인 이곳을 우린 운동화로 걸어 올라갔다. 방수가 되는 신발도 아니고 방한복도 아니다. 최대한 따뜻하게 입은 게 양말 두 겹과 목도리, 경량 패딩이 전부였다. 영하 10도로 내려간 상황에 올라가는 사람도 없고 내려오는 사람도 없어 이 길이 맞는지도 모른 체 추위와 싸우며 발길을 바삐 움직였다.
이곳에 사람이라곤 남편과 나. 단 둘 뿐이다.
'이 길이 맞겠지?' 온통 하얗게 뒤덮인 세상에 무릎까지 쑥쑥 빠지는 눈길을 오르며 이미 발은 내 것이 아니다.
'도대체 이 위에는 무엇이 있길래, 다들 여길 가는 거야' 왜 가는지도 모른 체 나는 남편을 따라 걷고 있다.
아직 다 낫지 않는 꼬리뼈가 시리다. 넘어지는 날엔 다시는 걷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며 정신을 바짝 부여잡았다.
기독교도 천주교도 불교도 믿지 않는 나는 그 험한 겨울길을 남편만 믿으며 계속해서 걸어 올라갔다. 한 시간쯤 되었을까? 사람을 보았다. 인사할 틈도 없이, 사실 다 왔냐고 물어볼 틈도 없이 스키를 장착하더니 우리가 힘들게 올라온 길을 가뿐히 내려갔다. 사람이 오긴 하는구나... 저 멀리 그토록 찾았던 성당이 보이고 추위를 달래기 위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침묵이 가득한 내부, 특별할 것도 화려한 것도 없는 그곳은 그저 따뜻해서 나가기 싫었다.
높이 올라오니 마을이 한눈에 보였다. 경치가 퍽 아름다웠고 매서운 칼바람에 눈물이 났다.
카즈베기의 봄, 여름, 가을은 매우 아주 예쁘다고 한다. 우리가 본 겨울의 카즈베기는 혹독하게 추웠고 과하게 아름다웠다. 너무 고통스러웠던 추위가 지금은 미화되어 그저 '추웠다'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 추위의 강도를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드론을 날리다 핸드폰의 배터리가 방전되어 꺼져 버리는 정도의 추위랄까?
추워도 아름다웠던 카즈베기의 봄, 여름, 가을이 보고 싶다. 다시 올라와 봄에는 어떤 냄새가 날지, 여름엔 또 어떨지, 가을은 어떤 색으로 채워질지 궁금해졌다. 다음엔 겨울 말고 다른 계절에 와야지.
처음이 주는 감동은 진하게 남는다.
내가 조지아를 가장 사랑하는 게 어쩌면
가장 많은 처음을 마주하게 되어서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