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민법 제17조, "제한능력자의 속임수"

by 법과의 만남
제17조(제한능력자의 속임수) ① 제한능력자가 속임수로써 자기를 능력자로 믿게 한 경우에는 그 행위를 취소할 수 없다.
② 미성년자나 피한정후견인이 속임수로써 법정대리인의 동의가 있는 것으로 믿게 한 경우에도 제1항과 같다.


제17조는 보통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 대단히 있어야 할 것 같은 조문입니다. 제한능력자가 속임수를 써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이 능력자라고 믿게 만든다면, 이러한 경우까지 제한능력자를 민법 안에서 보호할 필요는 없겠지요.


제1항과 제2항을 자세히 보세요. 적용범위가 조금 다릅니다. 제1항은 모든 제한능력자에 대하여 적용됩니다. 제2항은 제한능력자 중 '미성년자'와 '피한정후견인'에 대해서 적용됩니다. 앞서 배운 것들을 잘 떠올려 보세요. 제2항은 '동의'에 관한 내용인데, 앞서 공부하기를 성년후견인의 경우에는 취소권은 있지만 동의권은 없다고 했습니다. 피성년후견인은 민법에서 아주 강하게 보호받는 사람이고, 피한정후견인은 그보다는 덜 보호받을 사람이기 때문에 '취소' 보다는 '동의'를 중심으로 제도를 구성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피성년후견인의 경우에는 아예 동의제도 자체가 없기 때문에 제2항에다가는 넣을 수가 없는 겁니다.


피특정후견인은 앞서 공부할 때 강조했었지요? 애초에 제한능력자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17조에는 해당사항이 없고요(학설의 논의는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그런데 제17조에서 말하는 '속임수'란 대체 어떤 걸까요?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쉽지만, 실제 해석에서는 고민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제한능력자가 일부러 자신이 미성년자라는 것을 '굳이 얘기하지 않았'다면 어떨까요? 상대방도 미처 그걸 물어보지도 않은 상황이고요. 굳이 얘기하지 않은 것도 사실상 속인 거나 다름없으니까 속임수라고 쳐야 하는 걸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학자들이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 왔습니다.


판례의 태도는 어떨까요? 실제 유명한 사례를 보겠습니다(대판 1971. 12. 14, 71다2045). 수십 년 전 판례라 좀 옛날 일이긴 합니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서 아주 약간 각색을 좀 했습니다.


A는 미성년자입니다. 그런데 미성년자이긴 해도 집안이 좀 잘 살았는지 조그마한 회사의 사장이었을뿐더러, 본인 명의의 토지도 좀 있었습니다. 어느 날 B가 나타나, 그 토지를 사고 싶다고 했습니다. B는 다른 사람들이 '사장님'이라고 불러 주는 A가 미성년자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A는 예전부터 C에게 돈을 좀 빌린 게 있었습니다. C는, A가 땅을 팔아 B로부터 돈을 받게 되면 자신에게 진 빚을 그걸로 갚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인감증명서가 필요해진 A와 C는 함께 동사무소에 가서 A의 인감증명서를 받았습니다.


C는 그 인감증명서를 B에게 건네주면서, 이거 가져가서 등기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인감증명서에는 A가 성년자인 것으로 생년월일이 잘못 표기되어 있었던 겁니다. 등기하러 가던 B가 인감증명서를 힐끗 보니, A는 틀림없는 성년자인 것 같습니다. 이에 B는 마음 놓고 A와 계약을 마무리했습니다.

프레젠테이션2.jpg Designed by Freepik from www.flaticon.com

추후 A는 B와의 계약이 자신이 미성년자일 때 맺어진 매매계약임을 주장하면서 그 계약의 취소를 요구해 B와 A 간의 소송전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A의 승리였습니다. B는 A가 인감증명서를 변조해 스스로를 성년자라고 믿게 만들었고, 자기 입으로 "회사 사장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제17조에서 말하는 속임수를 썼다고 항변했지만 먹히지 않았습니다.


대법원은 A는 미성년자이지만 실제로 회사 사장이기도 했으므로 거짓말을 했다고 하기도 어렵고, 성년자라고 직접 얘기한 것도 아니고, 또 인감증명서도 A가 직접 변조했거나 알면서 방치했다고 보기도 어려워서 제17조에서 말하는 '속임수'라고까지 보기는 어렵다고 한 겁니다.


이와 같은 대법원의 입장은 아무래도 거래의 상대방보다는 제한능력자 본인을 보호하는 데에 초점을 둔 해석론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태도에 대해서는 학자들 중에서는 비판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적극적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뿐만 아니라 침묵을 지키는 등의 소극적인 행위도 속임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독자 스스로 판단해 보시길 바랍니다.


오늘까지로 해서 민법의 제1편(총칙)-제2장(인)- 제1절(능력) 부분을 모두 공부했습니다. 내일부터는 제1편제2장 중 두 번째 편인 제2절(주소)를 시작하겠습니다.




keyword
이전 18화민법 제16조, "제한능력자의 상대방의 철회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