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들은 9월부터 주담대를 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다니엘 대 킴이라는 미국 배우가 있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한국계 미국인이다. 한국계이기는 하나 한국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그런 배우는 아니다. 다만 1990년대에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은 몰라도 그가 나온 영상을 한 번 이상은 봤을 확률이 높다. 전혀 감이 안 온다고? 그의 명대사를 들어도?
그렇다. 그는 ‘꽈찌쭈’다. 보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미국 드라마 <Lost>의 ‘권진수’다. <Lost>는 배우 김윤진이 출연한 작품으로, 사실상 오늘날 전 세계를 호령하며 너와 나와 우리 모두에게 가득찬 국뽕의 원조격이 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때도 지금도 미드에 큰 관심이 없고, <Lost>에 대해서도 그냥 ‘김윤진이 미국 드라마에 한국 사람 역할로 나오는데 인기가 많다더라’ 정도로만 인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미드를 완주한 적이 0번에 가까운 머글 중 머글인 나는 로스트 속 김윤진이 연기한 장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꽈찌쭈가 나오는 장면은 몇 번이고 돌려 봤고 친구들과 따라하기까지 했었다. 나와 내 주변에서만 인기였던 것은 아니다. <이말년씨리즈>나 <선천적 얼간이들> 등 당대 최고의 웹툰에서도 패러디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꽈찌쭈 씨에게는 흑역사로 남았겠지만…
예산에 맞고 채광소음냄새 문제가 있는 저층 30평대를 가느냐 아니면 예산에서 1억 가까이 오버하지만 채광소음냄새 문제가 없는 고층 30평대를 가느냐 고민하다 저층 30평대 주인의 갑질에 분노해 예산에서 1억 이상 초과하지만 채광소음냄새 문제가 없는 저층 40평대를 선택해 던딜까지 완료해놓고 갑자기 웬 꽈찌쭈니 로스트니 하는 이야기를 떠들어 대고 있냐면 드디어 던딜을 마치고 이제는 비록 조금 가난할지언정 집을 사고파는 문제에 있어서는 홀가분해질 줄 알았던 그 직후 벌어진 일들에 대해, 앞에서 말한 꽈찌쭈의 한국어 명대사가 절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난 한 번만이라도 행복하고 싶은데 왜 나 김현유는 행복할수가 없어!!!”
결혼해서 내집마련 후 애낳고 짬푸하기 위해 애달복달 중인, 아주 평범한 대한민국의 젊은 엄마아빠인 우리 부부는 언제쯤 마음편히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 왜 우리같이 열심히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이 행복할수가 없는 거야?
미국 드라마에서 한국 배우를 한국인 캐릭터로 기용했다는 사실만으로 뉴스에 보도가 되던 2010년대를 지나 2020년대에는 K-컬쳐가 전 세계를 수놓았다. 세계는 모두 한국에 열광했다. 한국 연예인을 넘어 한국 패션, 한국 문화, 한국 역사, 한국 여행, 한국, 한국, 모든 한국적인 것이 모든 세계를 이끄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야말로 한반도 역사상 없던 황금기였다.
그러나 정작 같은 시기 한반도 내부는 끝없는 고난이 이어지는 지옥도 그 자체였다. 특히 부동산 시장이! 평범하게 집을 사고 짬푸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역경과 시련은 계속됐다. 연달아 터지는 문제들을 이겨내고 드디어 평생 갈 우리의 보금자리를 구했다 싶었더니 생각지도 못한 이슈가 발목을 잡았다.대출이었다.
7월 들어서부터 슬슬 시중은행들이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건드릴 거라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주담대 금리가 기준금리보다도 낮다는 경제지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던 와중이었다. 금리가 낮으면 부동산 시장이 활성화된다는 건 기본적인 이치다. 지난 5년 간 요동쳤던 부동산 정책 덕분에 ‘투기 세력’이 아닌 안정된 내집장만을 위한 평범한 국민들은 금리가 내리자마자 대출 행렬에 탑승했다.
문제는 부동산에 대한 수요는 높은데 공급이 없었다는 것이다. 박원순은 서울시장이던 시절 뉴타운 사업에 미온적이었다. 그는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서울시민들의 현실에 깊게 남아버렸다. 주택 공급 부족이라는 현상으로.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 부동산 가격은 급등했다. 덕분에 나는 갑작스런 상승기를 맞아 매매가가 급상승하고 매물의 씨가 마르는 상황을 목격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우려하던 정부가 칼을 빼든 것이다. 부동산 매물이 없는 상황에 ‘똘똘한 한 채’를 노리는 영끌족들이 대거 등장하자 가계빚이 위험한 수준으로 늘어나 버린 탓이었다.
정부는 시중은행에 금리를 올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야말로 ‘낮췄는데요 다시 올렸습니다’ 같은,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은행들 입장에서야 땡큐인 일이었기 때문에, 은행들이 정부에 못 이기는 척 가산금리로 장난질을 칠 거라는 분석이 쏟아졌다.
마음이 급해졌다. 계약금을 전달하고 몇 주 지나지 않아 주담대 이자가 곧 3.5%를 넘어설 거라는 예측이 나왔다. 아무리 여기저기서 금리가 올라갔다고 떠들어 대도 예적금 이자는 체감될 만큼 오른 적이 없었는데 주담대 이자는 코앞에서 하루가 다르게 마구 오르는 게 눈에 보였다.
“난 한 번만이라도 햄보카고시픙데 왜 나 꽈찌쭈는 햄보칼수가업서!”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자는 갚으면 된다. 문제는 정부가 대출을 아예 ‘규제’할 거라는 소문이 슬슬 새어나오고 있단 거였다. 우리 부부에게 첫 아파트를 사게끔 시그널을 던져 줬던 김현미 전 장관님이 선녀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관님은 집값의 30% 이상을 대출받지 못하는 정도로만 규제했지, 아예 주담대 자체를 규제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 정부에서는 가능한 조건에 제아무리 부합해도 타이밍을 놓치면 대출을 아예 못 받을 수도 있단 소리였다. 그저 소문으로 치부하기에는 꽤나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나왔다. 그 와중에 시중은행의 주담대 이자는 4%에 가깝게 올랐다. 3%대를 유지하던 경남은행이나 대구은행 등 지방 은행에 대출 문의가 빗발쳤다.
기자로 일한다고 해서 모든 분야에 있는 소식을 누구보다 빠삭하게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남들보다 많은 정보를 모으고자 노력은 제법 한다. 내가 한 노력의 일환은 신문 읽기였다. 격변하는 부동산 상황 속에서 나와 신랑이 그나마 이 정도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건 매일 신문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 국제, 모든 분야를 날마다 샅샅이 훑었다.
덕분에 은행이 가산금리를 올리고 정부가 대출 규제에 나설 것이라는 예측을 읽어낼 수 있었고,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정부의 압력을 강하게 받는 5대 은행이 아닌 보다 느슨한 외국계 은행에서 3% 후반대의 금리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한끝 차이였다. 8월 28일이었고, 시중은행들은 9월부터 주담대를 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정말 막차를 탄 셈이었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일렀다. 잔금을 받고 또 우리가 치르기 전까지, 끝날 때까지 끝난 건 아무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