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가격이 워낙 미쳐 날뛰고 있지만, 그래도 1억은 큰 돈이었다
2020년대 들어 부동산 가격이 워낙 미쳐 날뛰고 물가 상승이 가파른 성장세를 보인 탓에 1억이라는 돈이 평가 절하된 감이 있다. 여기저기서 10억, 20억 타령을 해 대니 상대적으로 적은 돈처럼 보이는 것이다. 인터넷 세상 속에서는 억대 연봉이 아닌 사람이 없고 부동산이 없는 사람이 없다고 하니 정말 1억 정도는 껌값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1억은 적은 돈이 아니다. 오히려 엄청나게 큰 돈이다. 요즘 같은 급여 인플레이션의 시대에도 평범한 직장인이 몇 년을 꼬박 일해도 월급만으로 1억 모으기는 어려운 일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원래 예산에서 1억 가까운 금액을 초과해 중고층의 30평대에 진입하는 게 꺼려졌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무리 넓고 쾌적하더라도 굳이 1억이나 태울 필요가 있나? 게다가 9억 이상부터는 신생아 대출도 나오지 않았다. 여러모로 이득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40평대라면 어떨까?
원래 예산에서 1억 정도 대출을 더 받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1억은 큰 돈이었고, 나는 이제 겨우 두 돌을 지난 첫째와 뱃속의 둘째로 인해 한동안 일을 쉬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대출 금액을 늘리면 아이들이 제법 자라 내가 맞벌이를 재개하기 전까지 꽤나 궁핍한 하우스푸어 생활이 이어질 게 분명했다. 매 달 가용할 수 있는 돈은 아이를 낳았다고 국가에서 지원해 주는 것까지 합쳐 200만원 수준이었다. 출산 후 1년이 지나면 지원이 줄어드니 가용 금액은 더 줄어들 것이었다.
하지만 40평대라면 어떨까?
채광, 소음, 냄새 문제가 전혀 없는 40평대라면?
서울 시내 뉴타운의 40평대 브랜드 자가 아파트 거주자가 감내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면 가난한 생활도 정신승리하며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저축 안 하고 생활비로만 쓰면 빠듯하긴 해도 손가락 빨면서 살진 않을 것 같은데?
그렇다. 같은 가격이라도 30평대에서는 하우스푸어 라이프를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결격사유가 있긴 했으나 같은 평수의 8억 초반대 집을 보기도 했고, 괜히 신생아대출을 받을 수 없다는 점도 끝까지 찝찝하게 마음에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40평대에서는 ‘정신승리’가 가능했다. 더 넓고 쾌적한 집에 살고 있다는 팩트가 모든 불편을 이겨버릴 테니까. 뼛속까지 속물인 게 똑닮은 우리 부부는 고민을 멈추고, 이튿날 바로 40평대 매물을 보러 새로운 부동산을 찾았다. 부동산에서는 2번 매물과 같은 단지의 40평대 저층 매물과 곧바로 연결됐다. 가격은 9억 3천.
일사천리였다. 문제의 1, 2번 매물과는 첫인상부터 달랐다. 문고리를 잡자마자 이 집이라고 생각했다. 2번 매물과 달리 탁 트여 있는 동이라 그런지 불쾌한 냄새도 전혀 나지 않았고, 저층임에도 햇빛이 아주 잘 들었다. 집주인은 1999년에 이 아파트가 세워졌을 때 입주해 한 번도 이사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내부는 리모델링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아 레트로했지만 깔끔하게 쓴 기색이 역력했다. 몇 년 고생하더라도 이 집에서 산다면, 행복할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근거는 없었지만 그 무엇보다도 강한 확신이었다.
우리는 천만 원 정도만 깎아 달라고 제안했고, 집주인은 흔쾌히 응했다. 던딜이었다. 우리는 이 집으로 갈 운명인 모양이었다. 신을 믿기는커녕 점술과 종교 등 모든 것에 의심 가득한 T 100% 인간이지만 우리가 이 집을 선택하기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돌아보면 운명이라는 표현밖에 쓸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우리가 집을 넓히려 하자 갑자기 부동산 시장이 상승기에 접어들어 30평대 매물의 가격이 뛰고, 남아 있는 저층의 매물들이 결격 투성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행하려던 거래 직전에 집주인의 갑질로 취소된 일련의 사건들 덕분에 우리가 생각도 하지 않던 40평대 집을 선택하게 되었으니까. 그간 지독하게도 매물을 보고 선택하는 과정이 진전되지 않았는데, 40평대를 보자고 마음 먹은 지 24시간 만에 던딜이 체결된 것만 봐도 이건 운명이었다.
우리의 첫 아파트를 사기로 한 매수인처럼, 40평대 집을 내놓은 매도인들 역시 무척 인상이 좋았다. 묘하게 동글동글 부모님과 딸이 다 닮은 가족이었는데, 닮은 얼굴만큼이나 서로에 대한 애정이 가득해 보였다. 계약서 체결을 위해 마주한 그들은, 우리가 매도 계약을 할 때 그랬듯 한 마디 한 마디를 통해 집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하긴 3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한 집이니 우리보다 더욱 마음이 깊었을 것이다.
직전 거주자가 어떤 사람들인지는 부동산 거래에 있어 크게 중시되는 조건이 아니긴 하지만, 다른 모든 상황에서도 그렇듯 나쁜 사람들보단 집에 애정을 가진 인상 좋은 사람들이 플러스 요인이 되는 건 분명하다. 계약금을 전달하고 난 뒤, 매도인 가족은 우리에게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라고 따뜻한 덕담을 건넸다. 우리는 진심으로 고개 숙여 고맙다고 인사했다.
P.S. 우리를 두고 어장관리를 하던 2번 매물의 집주인으로부터 연락이 온 건 매수 계약을 체결하고도 이틀이 지나서였다. 워낙 여러 부동산을 다녔다 보니 어떤 부동산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잊고 있던 와중이었다. “블라블라 부동산인데요, 사모님 계약금 입금할 계좌 전달드리려구요.” 이미 계약금을 입금한 지 이틀이나 지난 상황에서 걸려온 전화에 원래도 의심 많은 나는 경계 태세를 취했다. 세상 가장 차갑고 도도한 목소리로 “무슨 계약금이요?”라고 물었다가 2번 매물이라는 답변을 듣자마자 바로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다른 집을 계약했다는 얘기는 하지 않고, 정중하게 안 하겠다고만 말했는데 의외의 제안이 돌아왔다.
“집주인분이 죄송하다고, 이사비 좀 빼드릴 수 있대요. 8억까지 가능할 것 같아요.”
며칠 기다리는 동안 여러 팀이 와서 봤지만 8억2천에 그 집을 사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와 있는 매물이 없으니 갑처럼 행세했겠지만 지드래곤이 노래했듯 영원한 건 절대 없다. 상황은 언제라도 반전되기 마련이다. 이제는 공이 우리 쪽으로 넘어온 것이다. 이미 다른 집을 계약했으니 그 공을 받을 수도 없었지만.
꼬숩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리 부부 역시 상승기도 아닌 상황에서 반드시 6억 이상을 받으려고 튕겼다가 결국 상승기에 5억 8천에 집을 넘기게 된 경험이 있었으니까. 아마 2번 매물의 집주인 역시 우리가 그랬듯 어떤 교훈을 얻지 않았을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