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물이 없는 상황에서는 상대편이 갑이긴 했다. 그러나…
어떤 작가의 무슨 작품이었는지는 잊었는데, 충격적인 결말에 그 내용만은 잊지 못하고 있는 단편소설이 있다. 전세 만기를 앞두고 또 다른 전셋집을 구할지, 생애 첫 주택 구입을 할 지 고민하던 주인공의 눈앞에 너무나 완벽한 매물이 등장했다. 나쁘지 않은 인프라의 아주 낡지 않은 아파트. 매매만 가능한데 가격은 시가 대비 수상할 정도로 저렴했다. 주인에게 사정이 있어 급매로 나와 그렇다고 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여러 핑계를 대 가며 집 내부를 절대 보여주지 않는 거였다. 부동산은 비어 있던 다른 층의 같은 구조 집을 보여주며 어차피 짐을 빼면 큰 차이가 없을 거라며 매매를 종용했고, 주인공의 남편은 아무래도 찝찝하다며 만류하지만 이미 마음을 빼앗긴 주인공의 눈에는 다른 매물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결국 주인공은 집의 내부를 보지 못한 채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계약을 체결하고, 이사하는 날 아침이 밝았다. 입주하기로 한 아파트 앞에는 사다리차가 쉴 새 없이 묵은 쓰레기를 내리고 있었다. “저 집 쓰레기 집이예요. 집 주인이 한 10년쯤 전부터 온갖 쓰레기를 다 모아놨던 집인데…” 아파트 주민의 말에 주인공은 아연실색한다. 사다리차가 쓰레기를 꺼내는 동안 주인공의 짐은 아파트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라는 내용이었다. 그 소설을 고등학생 때 읽었던가, 대학생 때 읽었던가? 어쨌든 꽤나 오래 전에 읽은 소설이었음에도 내용이 아직까지 생생한 걸 보면 충격적이긴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책장을 덮으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집을 거래하기 전에는 무조건 실제로 가서 봐야겠구나. 모델하우스니 같은 구조니 하는 것에 넘어가면 안 되겠구나.’ 역시 어떤 장르의 책이라도 책을 읽는 건 인생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인근 부동산 열 곳을 돌았음에도 나와 있는 매물은 단 두 개 뿐인 상황에서, 우리는 일단 각각의 단지를 도보로 방문해 보기로 했다. 매물의 컨디션은 이랬다.
1. 2000년식 R브랜드 아파트. 1100세대. 30평대. 1층. 4년 전 인테리어 완료. 8억 3천인데 500만원까지는 네고 가능.
2. 1999년식 I브랜드 아파트. 30평대. 1150세대. 1층. 인테리어 되어 있으나 약간 현 주인의 취향이 반영돼 손을 조금 봐야 함. 8억 2천인데 1천만원까지는 깎아줄 의향 있음.
두 단지 모두 초등학교와 소아과, 마트 등의 인프라는 비슷했다. 단지를 나서면 모든 것이 바로 구비돼 있는 뉴타운이었으니까. 1번 아파트 단지 안에는 아이들과 엄마들이 바글바글했다. 단지 내에는 수영장과 일반형 어린이집이 자리했고, 상가 건물도 따로 마련돼 있었다. 신축 아파트와 비교하면 오래된 느낌이 나긴 했으나 단지 전반의 분위기는 아이를 키우는 젊은 부부가 살기 딱 좋아 보였다. 하지만 매물을 본 순간 우리의 마음은 짜게 식고 말았다. 단지 내에서도 지대가 낮은 곳에 위치해 있어 1층이라 해도 높이가 거의 지하 수준이었으며, 햇빛도 전혀 들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이라면 해당 동을 둘러싸고 초목이 우거져 창문을 열어도 사생활 노출의 우려가 덜하겠다는 점 정도였다. 하지만 창문을 열 일 자체가 없을 것 같았다. 예쁜 초록의 나무 주변엔 벌레가 많았다. 햇빛도 안 드는데 환기도 할 수 없다면 애를 키우기는 힘들 집이었다.
2번 아파트 단지에는 아이와 엄마도 많았지만, 그만큼 노인들도 많았다. 수영장이나 상가 건물은 없었지만 대단지인 만큼 가정형 어린이집은 여럿 있었다. 매물로 나온 집은 겉으로 보기에 햇빛이 안 드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주차장이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는 게 문제였다. 환기라도 한 번 했다하면 소음과 매연이 일상이 될 게 분명했다. 뭐 요즘이야 공기 청정기도 잘 나와 있고, 주변 가격보다 저렴하게 나온 공동주택의 1층이니 감안하고 살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해당 단지 앞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물을 묻힌 채 오랫동안 빨지 않아 안에 냄새가 고인 걸레로 닦은 것 같은 냄새였다. 나중에 돌아보니 그날만 그랬던 것이었지만, 우리의 마음을 식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결국 두 개의 매물 모두 결격사유가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집에 8억이 넘는 돈을 주고 들어가 평생을 살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중고층의 30평대를 9억 가까운 돈을 주고 사고 싶지도 않았다. 9억부터는 신생아대출도 불가능했다. 서울 시내에 9억 넘는 집이 절반 이상인데 신생아대출 적용이 안 된다니 매일 저출생 타령을 하는 이 나라는 아직 배가 불렀다는 입장이지만, 어쨌든 9억을 써 가면서 30평대 구축에 들어갈 마음은 없었다. 그건 과했다.
날짜에 맞춰 집을 보러 갔지만 반전은 없었다. 겉에서 본 것만으로 판단한 우리의 예상은 한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1번 집은 햇빛도 들지 않고 환기도 불가능했고, 2번 집은 여전히 밖에서부터 냄새가 나서 제대로 볼 마음도 안 들었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었지만 이미 집은 팔렸고 우리는 선택해야만 했다. 울며 겨자먹기로 밤을 새서 토의한 끝에 2번 집을 택했다. 그래도 햇빛은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아침이 되어 우리는 부동산에 2번 아파트를 하겠다고, 가계약금을 보낼 계좌를 알려달라고 전했다. 문제가 있어도 우리가 택한 집이니 잘 살아보자는 정신승리를 바닥에 깐 채였다.
하루가 지나도록 계좌번호는 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부동산에 전화했는데, 부동산에서도 난감해하는 눈치였다.
“매도인이 며칠만 시간을 달라고 하네요. 이것 참 죄송해서 어떡해요.”
대한민국 부동산사 격동의 10년간 별 일 다 겪고 별 꼴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간단히 말해 집을 보러 몇 팀이 더 오기로 했는데, 그 중 누군가는 에누리 없이 8억 2천에 사 갈 수도 있으니 우리를 보험으로 삼은 채 간을 보겠다는 거였다. 애초에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꼭 이 집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마음도 아니었고, 시간도 매물도 없어 어쩔 수 없이 차악을 고르고 고른 것이었는데, 자신들이 갑이라도 된 마냥 구는 걸 보니 거래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매물이 없는 상황에서는 저 쪽이 갑이긴 했다. 일단 알겠다고 한 뒤 나와 신랑은 하루종일 네이버부동산과 호갱노노를 들여다보고 온갖 부동산에 전화를 걸어댔으나, 갑자기 괜찮은 매물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과 같이 드라마틱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매물이 몇 개만 더 있었어도 상황이 완전히 달랐을 텐데. 네이버부동산에서 미터제곱을 평형으로 바꿔 보며 혁신초를 포기하고 아예 다른 동네를 알아봐야 할지 생각하다 말고 갑자기 벼락같이 한 가지 사실이 머릿속에서 연결됐다.
중고층에 위치한 30평대와 저층의 40평대는 거의 비슷한 가격에 시장에 나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