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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엘리 Aug 22. 2024

습원의 마구간 주변, 예상 외의 기억

젤다의 전설 -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61)

O월 KK일


다음 신수가 있는 마을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비슷비슷한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어 자라고 있는 숲길로 들어섰다. 나무 그늘 사이를 지나다 사슴과 멧돼지를 보았기에 으레 그러하듯 활을 꺼내 조준하는데, 숲 가장자리에서 누군가 싸우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나는 겨냥하던 활을 거두고, 전투가 벌어진 장소로 뛰었다. 멀리서 봐도 주로 공격을 하는 것은 보코블린임을 알 수 있었다. 붉은 보코블린 한 마리가 왠 남자를 향해 돌진하는 가운데, 방패와 검을 들고 보코블린을 막는 하일리아인이 보였다.


약간 버거워 보이기에 빨리 달려가 보코블린에게 칼을 휘둘렀다. 보코블린은 꽤엑 소리를 내며 금새 사라졌고, 그 남자는 바로 무기를 거둔 후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네 덕분에 살았어. 정말로 고마워."


'임터'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보코블린을 물리친 보상으로 내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더니 깊은 한숨을 쉬고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역시 도시나 마을 외에 안전한 곳은 이제 없겠지... 아내를 지킬 수 있도록 나도 더 노력해야겠어!"


아내...? 혼자 여행하는 게 아니었나 싶어 조금 놀랐는데, 그 때 한 여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가 바로 임터의 아내, 오제이였다. 그들은 큰 그루터기 나무 주변에 간이 천막을 치고 쉬고 있는 중이었는데, 보코블린을 맞닥뜨렸던 것이었다. 오제이는 내게 자신들이 여행을 하는 이유를 알려주었다.


"저희 둘은 고요한 공주라는 꽃을 찾아 여행을 하고 있어요. 물론 몬스터가 있어 위험한 건 알지만, 제가 억지를 부려 따라온 거예요. "


그들이 여행한다는 소리에 다소 놀란 내 눈을 보았는지, 오제이는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따라온 건 자기가 우겨서 그렇다고 말했다. 몬스터는 어디나 있으니 위험한 건 당연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사랑하는 부부란 그런 것인가...


내 생각의 흐름을 읽은 것처럼 오제이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

"하지만 남편과 함께라면 어떠한 고난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어요."



둘은 다정하게 다시 자신들의 천막으로 돌아가 자리를 잡았다. 그간 오제이는 계속 내게 남편과의 여행에 대해 말해주었다. 생각보다 힘들지 않지만, 이런 몬스터와의 전투가 있으면 억지를 부린 것 같다고도 말했다.

"제가 억지를 부려서 쫓아오는 바람에 남편의 발목을 잡았네요... 하지만, 여행지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절대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어요!"


오제이는 살짝 남편인 임터를 바라보더니 굳게 결심한 듯 말했다.


"... 그리고... 고요한 공주를 발견하면 영원한 사랑을 약속할 거예요."


고요한 공주... 하이랄 왕가의 공주가 사랑했다는 그 꽃이다. 푸른 빛이 도는 청초한 느낌의 그 꽃이 사랑의 맹세에 쓰일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꽃인 건가...? 아마도 자주 발견되는 꽃이 아니니까 그런 거겠지? 나는 오제이와 임터가 찾고 있는 고요한 공주를 요정의 샘 주변에서 발견했던 일이 생각났다. 요정의 샘을 찾아가 보라고 말을 해줄까, 어쩔까 고민하는데 임터가 오제이의 말을 듣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제이... 발목을  잡다니, 그런 생각한 적 없어. 나도 당신과 함께 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니 정말 행복한걸!"

임터는 그렇게 말하고 오제이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오제이는 그런 임터의 말에 감동한 눈치였다.

"여보..."

남편을 부르는 임터의 목소리에 뭔가 떨림이 섞였다. 가만... 나, 이 자리에 계속 서 있어도 되는 건가?? 뻘쭘해진 내게 임터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고요한 공주를 아내에게 보여 주고 싶어서 여행을 시작하려 하니, 아내가 따라가겠다고 우겨서 처음에는 좀 그랬었지. 하지만 함께 여행한다는 건 멋진 일이야. 나도 한 힘 하는 편이지만 아내를 지키려면 더 노력해야겠어!"



그 말을 듣더니 오제이가 임터에게 속삭였다.

"나는 당신이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 행복해."



그 말에 임터는 일어서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제이... 내가 널 평생 지켜 줄게!"


나는 두 사람의 뜨거운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보기가 부끄러워져 자리를 슬며시 떴다. 서로 사랑한다는 건 힘들어도 함께 하는 것... 몬스터가 두려워도, 함께 여행하는 동안 두 사람은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외로울 시간이 없다는 것은 부러웠다.


하이랄 왕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잠시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아름다운 광경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광경을 보며 감탄하다가, 가끔은 한숨이 나왔었다. 당시엔 좋은 풍경을 보고 있는데 왜 기분이 좋지 않을까 갸우뚱하고 말았던 적이 있는데, 임터와 오제이를 보고 깨달았다. 내가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두 사람은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것이 서로에게 더 좋은 추억이 되겠지만...


재앙 가논 토벌 전에 싸워야 할 것이 하나 더 늘은 셈인가....



나무들이 모여 있는 숲 너머로 하얀 연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구간이 근처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싶어 나는 내딛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입고 있는 하일리안 병사의 갑옷이 왠지 무겁게 느껴졌다. 투구를 잠시 벗고 서서, 펼쳐진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임파가 내게 건넸던 말이 생각났다.


"젤다 공주님이 가는 곳엔 그대가 늘 함께 있었다네....그러니 젤다 공주님의 기억은 곧 그대의 기억이라 할 수 있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할거라는 오제이와 임터의 모습이 자꾸 생각났다. 두 사람이 얼마나 함께 오래 여행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랑을 깨닫고 결혼하여 여행했으니 적은 시간은 아니었겠지. 나에겐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이 있었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잃어버린 기억들 속에 누군가는 있었겠지... 까지 생각을 하다, 임파가 한 말이 생각난 것이었다. 젤다 공주가 가는 곳이라면 언제나 나도 함께 갔었다는......


호위 기사였던 내가 젤다 공주가 갔던 곳에 동행했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에겐 재앙 가논에 맞서 하이랄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가 있었다. 자신의 능력을 발현하지 못해 다른 일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젤다 공주를 ...지키는 일이 내가 할 일이었다. 어떤 순간이든 재앙 가논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던 젤다 공주를...


떠올린 기억을 생각해 보면 언제나 젤다 공주를 호위할 수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지만(따돌려진 적도 있었으니) 재앙 가논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하이랄을 돌아다녔던 그 기간 동안, 난 적어도 외로움은 몰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젤다 공주와의 기억은 좋은 기억이 별로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년 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는 건... 임터와 오제이가 확실히 내게 정신적인 타격을 준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터덜터덜 걸어갔더니, 마구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 찾아온 마구간은 '습원의 마구간'. 마구간 마당에 반가운 칸기스 할아버지가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외롭다는 감정을 심하게 느껴서였을까? 할아버지의 존재가 무척 반가웠다.



할아버지는 습원의 마구간에서 보이는 하이랄 성을 그리고 있었다. 나를 보며 반가워하는 할아버지는 내게 물어볼 장소가 있냐고 하기에 시커 스톤을 켰다. 시커 스톤에 나타난 그림은 너무 평범한 숲길이었다. 방금 내가 지나쳐 온 숲속 길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데... 할아버지는 이 장소를 알 수 있을까?



할아버지 역시 내 짐작대로 어디나 있는 숲 모습에 약간 당황하셨다. 턱에 손을 짚고 골똘히 생각하신 할아버지는 '강 건너 저편 끝없는 늪 북동쪽 숲'인것 같다는 최종 결론을 내렸다. 할아버지가 말씀해주신 끝없는 늪이란 지명을 지도에서 찾아봐야겠다.



지도를 켜서 살펴보니 칸기스 할아버지가 갔었다는 끝없는 늪은 이 마구간에서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언덕 올라가실 때는 힘들어하시는 할아버지였는데, 산책은 꽤 멀리까지 가시네?



칸기스 할아버지와 대화를 마치고, 귀여운 꼬마가 한숨을 짓고 있기에 말을 걸어봤다. 아미브라고 하는 이 꼬마는 꽤 당돌한 구석이 있었다. 꼬마의 말에 따르면, 습원의 마구간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 외에 두 형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두 형이 일은 잘 안하고 놀기만 해서 자신의 할 일이 너무 많다고 걱정하고 있었다.



특히 각 마구간에는 주변을 설명하는 설명 담당자가 꼭 있어야 한다는데, 그 일을 자신이 맡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어린 아이가 주변을 잘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걱정은 되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투덜거리는 녀석이 귀여워서, 주변에 대해 설명해보라고 시켰는데...



생각보다 자세히 알고 있어서 꽤 놀랐다! 특히 하이랄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을 하나 알려주었다. '동쪽 갱도'로 가면 숨겨진 통로라서 몬스터나 다른 위험에 대한 큰 걱정 없이 잠입이 가능할 것 같았다.



북쪽에는 뭐가 있냐 물었더니 딱히 별 말은 없었다. 데스마운틴이 있다고 하기에 그쪽에는 마을이 있냐 물어봤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아미브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나는 습원의 마구간 주변의 사당에 들어갔다. '카야.미와의 사당'은 물이 흐르고 있는 사당으로, 아이스메이커를 활용해서 물을 오른 뒤 전투를 해야 했다. 크게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물이 흐르는 유속이 빨라서 극복의 증표를 받기 바로 전, 조금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극복의 증표를 받고 나오자 어느 새 오후가 되었다. 나는 칸기스 할아버지가 알려준 '끝없는 늪'을 찾아 길을 나섰다. 숲이 계속 이어진 쪽을 찾다 보면 언제나 그랬듯이... 우연히 기억의 장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희망을 가지고서 나아갔다.


강을 건너, 지도를 보면서 나무가 우거진 숲길 사이를 꼼꼼히 살폈다. 정말 비슷한 풍경이 많아서 여기저기 기웃거렸는데, 끝없는 늪 주변을 돌면서 천천히 걸어간 결과, 기억의 빛을 찾아냈다.

 


이 숲길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조금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시커 스톤을 꺼냈다. 바로 칸기스 할아버지에게 보여주었던 그림이 나타났다.



그림이 보여주는 모습과 비슷한 각도로 숲길 가운데에 섰다. 그림속 풍경은 화창한 날 같았지만, 슬쩍 슬쩍 시커 스톤 이미지 너머로 보이는 모습은 우중충한 회색빛이었다. 기억이 떠오르는구나 싶어 눈을 감았다.



짙은 회색 구름 아래, 엄청난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무겁고 굵은 빗방울이 내 머리 위를 때렸다. 하늘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거진 숲길이었건만, 빗방울은 그런 것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식이었다. 질퍽한 바닥이 느껴졌고, 발은 점점 무거워져 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숲길을 달리고 있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젤다 공주의 손을 꼭 잡고서 빨리 어딘가 피해야 한다는 심정뿐이었다. 등 뒤에서 숨이 차 올라 헉헉거리는 젤다 공주의 숨소리가 들렸다. 안쓰러웠지만,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우리는 어디를 가고 있었던 걸까? 나는 숨이 차올라 힘들어하는 것 같은 젤다 공주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몸은 진흙과 어디선가 튄 핏자국 등이 뒤섞어 엉망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나는 순간 그녀의 몹시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녀는 나를 쫓아 달리는 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게 아니었다!



조금 놀랐던 찰나, 젤다 공주가 내 손을 놓치고 넘어졌다. 앞서 달리던 나는 멈추어 서서 넘어진 그녀에게 다가갔다. 젤다 공주가 혹시 어디 다친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젤다 공주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주저앉은 자세로 흐느끼고 있었다. 젤다 공주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착찹한 마음이었다. 그래... 기억났다! 이 기억은, 영걸들과 헤어진 후 하이랄 성에 갔다가 도망쳐 나오던 중에 있었던 일이었다.


젤다 공주가 라넬산에서의 수행을 마치고 내려오자마자, 봉인을 깨고 나타난 재앙 가논... 임파의 말대로, 우리는 허를 찔렸었다. 재앙 가논은 만년 전 시커족의 기술에 당해 봉인되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듯, 젤다 공주가 힘들게 발굴했던 가디언을 원념으로 물들였다.



원래 작전대로라면, 4신수가 출격하여 하이랄 성에 떠오른 가논을 동시에 공격하게 되어 있었고 그 틈을 타 내가 재앙 가논을 쳐야 했다.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젤다 공주와 나, 그리고 임파는 하이랄 성으로 가까이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하이랄 성 주변 마을은 이미 초토화 상태였다. 붉은 원념으로 물든 가디언은 사방을 공격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에 우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젤다 공주와 나는 4신수가 하이랄 성 위로 떠오른 가논을 공격하길 기다렸다. 신수만은 떠올라 공격을 퍼부어주기를... 그렇다면 우리에겐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4신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으려고 하이랄 성 가까이 갔던 젤다 공주와 나는 가디언의 공격을 피해 동쪽 갱도로 숨어들었다가(아까 아미브가 알려준 바로 그 길은 이미 내가 알고 있던 길이었다) 리토족 전령을 마주쳤다.


리토족 전령은 리토의 마을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고 말했다. 신수 바.메도가 붉게 물들더니 폭주하여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로베리와 프루아를 찾으러 갔었던 임파가 들고 온 소식은 더욱 경악할 일이었다. 4 신수 모두가 가논의 원념에 물들어, 신수 안의 영걸들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젤다 공주는 하이랄 왕을 찾고 싶어했지만, 우리가 진입했던 하이랄 성의 갱도에도 가디언들이 침입했기 때문에 성 안으로 더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공주의 안전을 위해 공주를 억지로 끌고 하이랄 성 밖으로 나왔다.


방패로 가디언의 공격을 튕겨 내며 겨우 성 밖으로 나왔을 때 우리는 절망에 빠졌다. 신수가, 그렇게 믿었던 신수가 나타나긴 했으나 하이랄 대군을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분노에 가까운 슬픔은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었다. 우리가 하이랄 성 동쪽 성벽을 벗어날 때, 살아남은 근위대원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젤다 공주를 보자 어쩔 줄 몰라했다.



하이랄 왕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근위대원들에게 절박하게 왕의 위치를 물었던 젤다 공주에게 돌아온 대답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과 같았다. 하이랄 왕이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젤다 공주는 눈물을 흘리며 사실이 아닐 거라고 외쳤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렇게 슬퍼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가디언이 바로 쫓아왔으므로 나는 젤다 공주의 손을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가디언의 공격으로 로베리, 프루아, 임파 역시 뿔뿔이 흩어졌다. 성에서 일단 멀어지는 것이 급선무였다. 비교적 안전한 남쪽 지역으로 군대를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남은 하이랄 대군은 비상시엔 철옹성의 추낙 요새로 집결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쪽 길은 젤다 공주를 모시고 피신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나는 하이랄 요새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는 젤다 공주의 모습이 노출되지 않도록 평소엔 위험할 수도 있는 숲 안쪽 길을 택했다. 늪지가 있는 쪽은 가디언들도 위험하므로 접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디언은 물에 빠지면 바로 망가진다) 그렇게 우리가 달려온 길은 끝없는 늪 지역 주변이었고, 이 숲길 사이를 달리다 젤다 공주는 넘어진 상황이었다.


흐느끼던 젤다 공주에게 가까이 갔더니 그녀는 울음을 삼키다 지친 것 같았다.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은 비와 섞여 땅에 떨어졌다.


"... 신수가... 가디언이... 우릴 공격하다니... 재앙에게....... 가논에게 빼앗겨 버리다니......"



젤다 공주는 차가운 흙바닥 위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아니, 몸을 일으킬 수 없는 것 같았다. 왜 아니겠는가. 그녀가 받은 충격이 어느 정도일지 헤아릴 수 없었다. 나는 젤다 공주의 흐느끼는 모습을 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가디언의 낌새나 원념의 느낌은 주변에 없었다.


내가 젤다 공주의 곁에 조금 더 가까이 가자, 공주가 고개를 들었다. 양 눈가는 이미 눈물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젤다 공주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결과를 곰씹으며 중얼거렸다.

"다르케르도 리발도 미파도.... 우르보사도.... 지금쯤 이미 신수 안에서....."


4신수가 우리를 공격했다는 것은, 젤다 공주의 말 대로 영걸들이 신수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일 터였다. 목숨을 걸고 재앙 가논에게 맞서기로 한, 각 부족을 대표하는 멋진 영걸들... 그 실력자들마저 재앙 가논은 너무나 손쉽게 숨을 앗아갔다. 젤다 공주의 말을 들으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젤다 공주는 잠시 나의 눈을 쳐다보았다. 이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보다 더 최악일 수 없는 순간. 젤다 공주는 애써 울음을 그치려 해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나의 표정을 보던 젤다 공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더니 애통하게 외쳤다.



"제 탓이에요!"



"봉인의 힘을 각성시키지 못하고......"



"가논에게 대항할 유물들마저 빼앗기고......"



젤다 공주의 절규를 들으며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가... 더욱 세차게 우리의 얼굴 위를 그었다. 다시 자책을 시작하는 공주.... 차라리 가논을 원망하면 좋으련만, 성실한 젤다 공주는 자기 탓을 했다.



"제가.. 제가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어요...."



기억 속의 나는 젤다 공주의 절규를 그저 듣고만 있었다. 안타깝게도 듣고만 있었다. 젤다 공주에게 그건 공주의 탓이 아니라고 말해줬어야 했다. 하지만 꿀 먹은 벙어리마냥 기억 속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소중한 사람들을...! 국민들을... 동료들을... 돌아가시게 만들었어요......"


자신의 잘못이라며 자책하는 젤다 공주가 안쓰러웠다. 어떻게 해서든 젤다 공주를 다시 일으켜서 좀 더 안전한 곳으로 가야 했지만, 나는 젤다 공주의 슬픔에 함께 젖어 잠시 내가 할 일을 잊었다. 이럴 때 누군가 어떻게 하면 된다고 알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어떡하면 좋지? 고민하고 있는데, 젤다 공주가 갑자기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이같이 터지는 큰 울음에 너무도 놀랐다. 늘 의연한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감정은 꾹꾹 참아왔던 젤다 공주가 ...



젤다 공주는 그렇게 울음을 터뜨리며 내 품에 안겼다. 흐느끼는 그녀의 흔들림이 그대로 내게 쏟아졌다. 그래... 차라리 힘껏 슬퍼하는 것이 지금의 젤다 공주에게 나은 게 아닐까. 100년 전 당시에는 무척 당황했지만, 현재 기억을 보고 있는 나는 젤다 공주를 안아줄 수 있다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차가운 빗줄기와 반대로 품 안의 젤다 공주에게서는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젤다 공주의 슬픔을 하늘도 함께 하는 것 같았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나는 다짐했었지. 이 사람의 슬픔까지도, 내가 지켜야겠다... 그래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젤다 공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하늘을 바라보았던 그 모습을 끝으로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젤다 공주와 슬픔을 나누었던 절망적 장소가 바로 이 숲이었다니....



눈을 다시 뜨자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날과 너무도 다른, 싱그러운 풀냄새와 바람이 숲길을 가득 채웠고 풀벌레 소리가 평화롭게 들려왔다. 팔 안에 젤다 공주의 따스한 느낌이 아직 남아있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최악의 날을 맞았던 그 날이, 하필 젤다 공주의 생일이었다는 것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나는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젤다 공주를 그렇게 포옹한 일이 있었던가?'




갑자기 그 사실을 깨닫자 어딘가 가슴께 주변이 뻐근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내려앉는다는 건 이런 느낌인건가? 가슴께를 슬쩍 어루만졌지만 통증은 진짜였다. 젤다 공주는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늘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여자'로 느껴진 강렬한 기억이 있었다니......


다른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지만, 언제나 그랬듯 역시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더 기억이 나면 좋겠지만... 나는 왠지 초조한 기분이 들어 100년전 그날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이 기억을 떠올리기 전까지, 나는 젤다 공주와의 관계는 단지 내 의무라고만 생각했다. 영걸로 뽑혀 협력하는 동지이자 그녀를 지키는 기사로써의 느낌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설마. 설마....  아니었던 걸까?



낮에 만났던 임터와 오제이의 다정한 모습이 다시 생각났다. 설마, 젤다 공주와 나.... 연인이었던 건 아니겠지? 만약... 만약... 그랬다면 그건 어떻게 되는 거지?


혼자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내 앞에, 이미 어두워진 하늘이 펼쳐지고 별이 하나 둘씩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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