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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찾아올 때

슬픔에 대하여

by 햇살나무 여운

#슬픔의방문 #장일호


이제는 슬픔을 보내줘야 할 때.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나의 오래된 화의 정체가 사실은 슬픔이었음을 깨달았다.

여전히 슬퍼하기보다 화가 먼저인 우리들이 참 많다.

우리는 슬픔은 약하고 부끄러운 감정으로 치부하며 숨기거나 회피하거나

느끼지 않고 묻어버리는 쪽을 택한다. 울기보다는 화내는 쪽이 더 쉬우니까.

슬픔을 있는 그대로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참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 슬픔이 방문하는 날이 오더라도

슬픔에게 기꺼이 문을 열어주고 그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환대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가난, 죽음, 폭력, 차별, 투병, 상실, 돌봄, 일, 결혼, 가족 그리고 여성이라는 존재 그 자체!


이것으로부터 단 하나도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들.

나는 직장 생활 내내 “여직원”이라고 부르는 그 단어 자체가 정말 화가 났다.

그 반대말 “남직원”이라는 단어는 사전에 존재하기는 하나?


어떤 형태의 폭력이든 단 한 번의 폭력이라도 영혼에 자국이 남는다.

죽을 때까지 영원히 잊히지 않는.


폭력은 진행형의 상해치사(傷害致死)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휘가 딸린다.)

내 엄마는 '운이 좋아' 그때 죽지 못했을 뿐,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렀지 않은가.


여성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셀 수도 없이 수많은 '미수에 그친 사건들'로부터,

길 위의 까닭도 없는 갑작스럽고 어이없는 사건들로부터 어쩌면 우리는 모두

피해자이자 생존자이기도 하다.


책 속에서 엄마'도' 피해자였다는 고백이 새삼 놀랍지도 않아서 더 슬픈 현실.


'이미' 피해자이자 '아직' 생존자였던 엄마에게 그것마저 겪게 할 수는 없어서

어쩌면 평생의 비밀로 간직해야 했던 우리들의 이야기.


<슬픔의 방문>이라는 책이 나에게 찾아왔을 때,

그 이야기를 꺼내줘서 고맙다고, 기록해 줘서 고맙다고 그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혼자서 필사만 하던 나는 용기 내어 북토크도 찾아가고 독서 모임도 찾아갔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 보이게’ 이야기할 수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수많은 '아무렇지 않을 수 없는' 시간들을 지나왔을까.


내가 가장 잘한 일은 ‘살아 있는’ 일이다.

- 장일호 <슬픔의 방문>


살아오는 내내 너무나 척박했다. 매일매일이 화전민처럼 맨땅을 일구고 일궈도 삶은 나아지지 않고,

어쩌면 그렇게 파고 파고 또 파도 돌만 나오는지. 흙수저는커녕 내가 가진 호미는 무르디 무르고.

좋은 어른을, 좋은 선배 한 사람을 만나기가 정말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렇다면 내가 좋은 어른이 되고, 좋은 선배가 되어야겠다고. 그래도 세상은 살만 하다고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으려면 스스로 좋은 사람으로 좋은 삶으로 그 증거가 되어야겠다고. 그러려면 앞으로 남은 생 부지런히 일궈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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