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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승객

두 갈래 길

by 햇살나무 여운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때, 가끔 토요일마다 엄마가 싸주신 반찬을 들고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자취를 하고 있는 언니를 만나러 갔었다. 시골에서 혼자서 버스를 타고 두 시간 반을 가야 했다. 그것도 여행이라면 여행이었을 텐데 나는 언니가 마중을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가는 내내 혼자서 무섭기도 하고 조마조마했다. 어릴 적 고속버스를 타고 도시에 살고 있는 친척집에 갈 때에도 버스가 휴게소에 들르면 혹시라도 내가 탔던 버스를 못 찾고 길을 잃지는 않을까, 버스가 나를 버리고 떠나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겁이 나서 화장실도 못 가고 말도 못 하고 꾹 참았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성인이 되어서도 나는 여전히 혼자 떠나는 여행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그때 6학년 담임 선생님은 글자 그대로 ‘남’ 자가 들어가는 아주 딱딱한 남자 이름을 가진 여선생님이셨는데 제법 나이가 있으셨다. 아마도 선생님의 부모님이 다음번에는 아들을 바라고 지은 이름이 아니었을까? 선생님의 성함보다도 더 인상 깊은 것은 선생님께서 장거리 통근자였다는 점이다. 선생님 댁은 우리 언니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바로 그 도시였다. 90년대 초반이었으니 도로가 지금처럼 좋았던 것도 아니고 선생님께서 그 당시 자차로 운전을 하며 다니신 것도 아니니 왕복 5시간에 가까운 거리를 선생님께서는 매일 출퇴근을 하며 교직생활을 하신 것이다. 어린 마음에 선생님이 정말로 큰 어른처럼 위대해 보였다.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그 점은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생활을 어떻게 유지하셨을까?

내가 선생님 댁이 그 도시인 걸 알게 된 건 어쩌다 같은 버스를 타면서부터였다. 버스에서 나를 발견한 선생님은 나에게 자초지종을 물으셨고, 나는 언니에게 가는 길에 세상 든든한 어른 동승객이 생겼다. 비록 매번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선생님과 같은 버스를 타는 날이면 나는 그제야 안심이 되어 창밖 구경도 하고 아름다운 남도의 풍광을 눈에 담으며 아주 조금 여행다운 기분을 느껴 보기도 했던 것 같다.

목적지에 도착해 버스에 내리면서 언니를 발견한 후에야 나는 긴장을 온전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언니의 자취방은 기찻길 바로 근처였다. 걸어가는 길에 여기저기서 여전히 만날 수 있었던 매캐한 화염병의 흔적들. 토요일 저녁 둘이서 동네 과일 가게에 들러 가진 돈으로 겨우 사과 한 개 바나나 한 개를 사 먹었던 기억도, 일요일 이른 아침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에 잠이 깨어 자율학습을 하러 일요일에도 학교에 가는 언니를 따라 고등학교 교실도 구경하고, 같이 열심히 공부하는 언니 친구들도 만나고, 언니 옆에서 나란히 앉아서 그림도 그리고 낙서도 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던 기억도 떠오른다. 언니의 글씨체가 참 예뻐서 부러웠던 기억도, 내가 어릴 적 일찍부터 영향받았던 책들은 대부분 언니가 읽던 책들이었다는 것도 지금에서야 새삼 떠오른다. 나보다 여섯 살이나 많았던 언니가 그때 내게는 참 커 보였었다. 내가 중학교를 갔을 때도 선생님들로부터 나는 먼저 졸업한 언니의 동생으로 불릴 때가 더 많았다. 그만큼 나는 어쩌면 언니를 동경하며 컸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언니는 그때부터 혼자였다. 너무 일찍부터 혼자였다. 너무 오래 쭈욱 혼자였다. 고등학교 때부터도 집에 잘 오지 않았다. 대학교는 또 혼자서 서울로 가고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서로 다른 길을 갔다. 언니는 홀로 살아내기 위해 어떤 시간을 견뎠을까? 내가 홀로 버스를 타고 언니에게 오는 동안 내내 두렵고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듯이 언니는 너무 일찍부터 홀로 오래도록 그렇게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는 길에 운 좋게 든든한 어른 동승객이라도 만났는데, 언니는 그마저도 만나지 못했을까? 내게 그토록 커 보였던 언니도 결국엔 고작 고등학생이었고, 20대였을 뿐이었는데 제대로 품어주고 돌봐주는 어른도 없이 그 시간들이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그래서 그 외로움이 독이 됐을까? 언니도 그때 참 어렸던 건데, 어쩌다 그토록 외로운 길을 선택했을까? 지금은 춥지 않게 지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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