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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수리 마음수리

서운함에 대하여

by 햇살나무 여운



하루는 남편이 퇴근을 하면서 샤인머스캣 포도 한 송이를 들고 들어왔다. 송이가 제법 컸다. 요즘 가격이 워낙 비싸서 선뜻 사 먹을 수 없는 과일인데.


"웬 포도?"


"오늘 방문한 고객님이 고맙다고 한 송이 싸주셨어."


"어머나! 진짜?"


감동이었다. 남편이 집수리 일을 시작한 지 몇 달도 채 되지는 않았지만 그 사이 두세 번 넘게 찾아주는 단골도 생기고, 이번엔 비교적 간단한 수리였는데 기본 출장비 이외에 말 그대로 '덤'으로 챙겨주신 것이다. 그 마음과 손길이 너무 소중하고 다정했다.


남편이 하는 일을 쫓아다니며 거들고 곁에서 지켜보면서 알면 알수록 말은 못 해도 솔직히 속상할 때가 더 많다. 무조건 제일 저렴한 것으로 당장 급하게 해달라고 했다가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각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아침 일찍부터 클레임을 걸어올 만큼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구나 새삼 배울 때도 있었다. - 그건 정작 샤워기의 문제가 아닌데 - 배보다 배꼽이 되어버린 - 받지 못한 - 추가비용도 비용이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읽고 고쳐주고 맞춰주려면 어디까지 얼마나 섬세하고 꼼꼼해야 하는 걸까.


그렇게 속상하고 서운했다가도 열 번 중에 한두 번은 또 이렇게 고마움에 쉽게 감동하고 쉽게 잊고 쉽게 풀린다. 난 참 쉬운 사람이다. 사람 사는 게 별 건가? 서로 돕고 나누며 사는 거지.




어제는 드디어 옷장 하나를 버렸다. 몇날며칠을 벼르고 벼르다 겨우 비웠다.


그 옷장은 결혼할 때 신혼살림으로 남편과 함께 재활용센터에 가서 처음 장만한 가구였다. 이미 중고로 우리 곁에 와서 자그마치 13년을 함께 했다. 이사도 일곱 번쯤 함께 다녔다. 몇 번의 버려질 위기를 넘기면서 끝까지 우리 곁을 지켰는데, 마침내 떠나보내 주었다. 정말 보잘것없는 살림이지만 정이 제법 들었었나 보다. 이렇게 하찮은 물건과의 인연도 떠나보내는 데에 이렇듯 시간이 꽤 필요한 일인데 사람 인연은 오죽할까. 그래도 두 쪽 중에 아직 반쪽은 남았다오.


남편과 함께 옷장을 비우고 옮기고 내리고, 손수레에 싣고 끌고 밀고하는 과정 중에 서운하기도 하고 처량하기도 하고 마음이 뭔가 간질간질 이상했다. 허름한 옷장 탓인지, 허름한 우리 살림을 들킨 것 같은 가난한 마음 탓인지, 앙상한 나뭇가지 끝에 걸린 계절 탓인지 그저 까닭 없이 쓸쓸하기도 했다.


그런데 또 그 마음 들키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얼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남편에게 말했다.


"저 구름 봐봐요. 강아지 얼굴 같아."


"어디? 어디?"


먹고살 걱정에 힘들다고 투정 부리기보다는 서로 그렇게 말하며 웃을 수 있는 우리여서 참 고맙고 다행이었다. 앞에서 끌며 잘 따라오고 있느냐고 뒤돌아 묻는 그 모습과 뒤에서 밀며 잘 가고 있느냐고 쓰러지지 않게 받쳐주고 붙잡아주는 내 모습에서, 그래! 이거면 된다고. 이거면 충분하다고. 별 것 아닌 일에도 이렇게 함께 웃으며 재미있게 살자고 그거면 되는 거라고. 낡은 옷장처럼 삐그덕거리던 내 마음을 눈치챈 그는 웃음 한 번으로 금세 가볍게 고쳐 놓는다.


그나저나 요즘은 버리는 데에도 배보다 배꼽이다. 아예 들이지를 말자.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집중하자.


워낙 없이 시작해서 신혼 초부터 그릇이며 가구며 여기저기서 얻어 온 살림이 많았다. 그중에는 물론 아주 좋은 새 물건으로 귀하게 선물 받은 것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쓰던 물건으로 버리기는 아깝고 그냥 두기에는 짐스러운 것들이 많았다. 지인들이 이사를 가면서 급하게 우리에게 남기고 간 살림살이도 제법 되었다. 헌 냄비에 깨진 항아리까지. 그래도 나름 마음 내어 챙겨준다고 주는 것이라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 탓에 처음에는 고맙다고 받았는데, 내게 와서도 결국 쓰임 없이 쌓여있는 경우가 많아졌다. 게다가 그런 물건을 줘놓고서 생색까지 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마저도 막상 아까운 생각이 들었을까? 내가 그런 기분을 느껴봤고 그 마음을 알기 때문인지 나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나눔 할 때 가능하면 새 물건이나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을 내어주려고 한다. 아니면 그냥 제 값을 치르고 좋은 것을 사서 제대로 된 선물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정이 동정이 되어버리기도 하니까. 나조차도 미처 그 선을 지키지 못했던 순간들에는 깊이 반성한다.


천천히 하나하나 그 물건들을, 그 마음들을 정리하며 거기에 얽혔던 인연들을 한 번쯤 떠올리며 떠나보낸다. 때로는 오래된 물건에 다시 숨을 불어넣어 살려내기도 한다. 거기에 얽힌 인연도 다시 살아난다. 비움 속에 보물찾기 같은 그런 순간을 만나면 또 소중하고 고맙다.


인생에 겨울이 찾아오면 저절로 알게 된다. 알곡은 남고 쭉정이는 가벼운 바람에도 훅- 날아가버린다는 것을.


가을은 봄의 거두어들임이요
겨울은 봄의 간직해둠이다.

- <대학연의> 중에서



옷장 잘 가! 그동안 함께 해줘서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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