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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평 물침대

고난에 대하여

by 햇살나무 여운


며칠 전 남편의 현장일을 도우러 갔다가 끊어진 수도 호스를 보고 옛날 생각이 났다. 아직도 생생한 그날.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물이 무섭다. 물난리가 무섭다.




10여 년 전 남편이 명상센터를 맡아 운영할 때였다. 갑작스레 불가피한 상황이 생겨 상가를 새로 얻어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자금난으로 인해 우리가 가진 재산 전부였던 원룸 보증금을 빼서 상가 임대 보증금에 보탤 수밖에 없는 결정을 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말 그대로 우리는 방을 뺐다. 그리고 새로 얻은 50평 상가로 들어가 한 귀퉁이 구석에 샌드위치 패널로 칸막이를 치고 생활공간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먹고 자고 하면서 다시 원룸을 얻어 나오기까지 3년을 살았었다. 나는 출퇴근하며 직장에 다니고, 남편은 새벽부터 밤까지 그곳에 매여 명상을 지도했다. 남편이 연수나 출장을 가기라도 하면, 결코 아늑한 '홈 스위트 홈'이 될 수는 없었던 50평 상가 건물 한 구석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나는 밤새 몹시 무섭기도 해서 뜬 눈으로 지새우기도 했었다.



급하게 이사를 해놓고서 시간도 돈도 사람도 없었던 우리는 인테리어 비용을 아끼기 위해 가능한 부분은 직접 셀프로 작업을 하기도 했고, 오래된 문짝이나 가구 등 있는 살림들을 최대한 살려 재활용을 하기도 했다. 몇 날 며칠 꼬박 밤을 새우며 50평 바닥에 전기난방필름도 직접 깔고 침낭을 깔고 새우잠을 자기도 했었다.




이사와 공사를 대략 마무리한 지 한 달쯤 되었을까? 새벽에 잠이 깨어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났는데 발밑이 축축했다. 온수매트에 물이 샜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방문을 열고 발을 내디뎠다. 순간 "첨벙!" 했다. 어디선가 물이 콸콸콸! 쏟아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모든 것이 물거품, 아니 물바다! 아니, 물침대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게 망연자실이구나.


밖으로 드러난 수도관 하나가 끊어져 새벽 내내 물이 쏟아진 모양이었다. 우리가 직접 설치했던 전기난방필름도 장판도 모두 물에 둥둥 떠다니고, 직접 손수 들고 걸어서 나른 살림살이들도 전부 물에 잠겨 있었다. 찰랑찰랑 거리는 50평짜리 물침대가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래층 상가는 최고급 이태리 수입가구 전문점이었는데. 천만다행 만만다행으로 아래층 구석에 조금 누수가 있었지만 경미한 피해라고 괜찮다고 했다. 그나마 새벽에 일찍 발견해서 건물 밖까지 물이 넘쳐 흐르지는 않은 것이다. 우리가 거기서 살지 않았었다면, 새벽에 깨지 않았었다면...


수도를 잠가놓고 물을 퍼내고 가구와 살림살이를 다시 다 드러내고 전기난방필름과 장판도 모두 걷어내어 옥상에 내다 말렸다. 그리고 우리는 몇 날 며칠 밤새워 해냈던 그 모든 작업을 묵묵히 정확히 다시 반복했다. 나는 말이 안 나왔다. 할 말을 잃었다.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한다고. 도대체 어디까지 겪어야 하는 것일까. 어디에 대고 원망을 퍼부어야 할까, 누구를 붙잡고 하소연을 해야 할까 말없이 하염없이 눈물만 났다.


글 몇 줄로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남편은 오늘도 그날처럼 끊어진 수도를 다시 연결하고 몇 번을 거듭해서 철저하게 마감을 하고 누수가 없는지 한참을 재확인하고서야 일을 마무리하고 일어섰다. 나는 그날처럼 같은 마음으로 그 뒷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남편이 말했다.


“물이 무서워요. 물은 정말 무서운 거예요. 단단히 해야 해요.”


어디까지 얼마나 해봤느냐고? 어디까지 당하고 잃어 봤느냐고? 언제나 전부였다. 가진 전부를 내걸었고 언제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진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진심(眞心), 진솔한 마음! 그리고 진심(盡心), 온 마음을 다 하는 것! 우리는 그 둘을 다 했다. 다 해봤다. 언제나 그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어서, 그 방법밖에는 몰라서. 그러나 화불단행이라고 고난은 끊임없이 우리를 주저앉혔다. 마치 어디까지 해 내는지 보자 시험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우리는 또 보란 듯이 묵묵히 다시 일어서고 길을 나아갔다.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고난은 우리를 주저앉혔을지는 몰라도 결코 죽이지는 못했다. 우리는 깨지고 부서지고 밟히고 담금질되는 만큼 더 단단해지고 더 빛날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돌멩이가 다이아몬드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고난이 자산이고, 고생이 스펙이다.


절망! 끊어졌다면, 다시 이을 것이다. 더 단단히!



너를 죽이지 못한 모든 고통은
결국 너를 성장시킬 것이다.
- 드라마 <환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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